헬싱키 로카마티오 일가 이면의 사실들 (개정판)
“어떤 작가의 첫 번째 소설은 정말 잊을 수 없다!”
얀 마텔을 대체 불가능한 작가로 각인시킨
월드 프리미어 데뷔작
이 책을 덮고 나서 어쩌면 당신은 얀 마텔이 농담인 척 들려주는 생의 이면들,
그것을 다루는 문장의 방식 때문에 웃게 될지 모른다. 동시에 눈물 한 방울을 주룩 흘리게 될지도.
어떤 작가의 첫 번째 소설은 정말 잊을 수 없다. [헬싱키 로카마티오 일가 이면의 사실들]이 그렇다.
_조경란(소설가)
성공한 작가의 초기작을 보는 일은 언제나 흥미롭다. 더구나 그 작가가 태평양 한복판의 구명보트에서 호랑이 한 마리와 동거하게 된 인도 소년 파이([파이 이야기])와 어느 날 갑자기 남성에서 여성으로 바뀌어버린 ‘나’라는 매력적인 인물들을 그려낸([셀프]) 얀 마텔이라면 즐거움은 더욱 배가된다. 무엇보다 [헬싱키 로카마티오 일가 이면의 사실들]은 얀 마텔이라는 비범한 작가의 상상력과 작가적 역량이 초기부터 남달랐음을 확인시켜주고 있는데, 이 소설집에 수록된 네 이야기들은 한 사람이 썼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그 소재와 문체, 스타일 등이 모두 달라 단편 하나의 성공에 일희일비하지 않겠다는 작가의 재기와 결기가 돋보인다.
예컨대 표제작인 「헬싱키 로카마티오 일가 이면의 사실들」에서는 에이즈로 죽어가는 친구와 20세기 역사에서의 희망과 절망의 순간을 병치시키는가 하면, 「죽는 방식」에서는 한 사형수의 죽음이라는 틀림없는 상황을 다양하게 변주하고, 「비타 애터나 거울 회사」에서는 페이지를 왼쪽과 오른쪽, 세로로 분할해 각각 다른 화자의 이야기를 펼쳐놓기도 한다.
얀 마텔이 어떻게 자신의 작품 세계를
창조해왔는가에 대한 해답
마텔은 이 소설집에 수록된 네 편의 이야기들을 특유의 진지한 주제의식과 지성적이고 반어적인 위트, 결코 핵심을 놓치지 않는 섬세한 문장으로 절묘하게 요리한다. 각 이야기들은 스토리텔러로 손꼽히는 마텔의 작품답게 모두 배경과 상황, 설정이 다르며, 줄거리의 곡절 또한 독자의 주의를 송두리째 빼놓을 정도로 흥미진진하다. 더욱 놀라운 것은 매 편의 스타일이 하나같이 판이하다는 것이다. 기존의 평범한 소설 형식은 거부하겠다는 듯 이야기 하나하나마다 다채로운 서술 기법을 활용함으로써 문자 그대로 스타일의 향연을 취하고 있는데, 기법에만 경도된 치기 어린 작가의 그것이 아닌, 주제와 긴밀하게 호응하며 작품의 맛을 더욱 살려주는 필수 요소로서의 스타일을 구사하고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작가의 관심사는 이처럼 화려한 스타일의 과시에만 머물러 있지 않는다. 이 작품집에 수록된 이야기들의 제재는 죽음, 영감靈感, 음악과 기억 등으로 다양하지만 결국 모든 이야기들은 깊은 절망 속에서 오롯하게 떠오르는 희망이라는 주제로 매조지되고 있다. 얀 마텔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희망은 죽어가는 친구와의 우정을 통해, 포화가 쏟아지는 베트남 전장에서 울려 펴지는 바이올린 선율을 통해, 영원히 잊지 못할 지난날 아름다운 사랑의 기억을 통해 그 얼굴을 바꾼다. 절망과 공허의 삶 속에서 희망을 노래하는 [헬싱키 로카마티오 일가 이면의 사실들]은 우리 시대 가장 돋보이는 작가 중 한 사람인 얀 마텔이 어떻게 자신의 작품 세계를 창조해왔는가에 대한 해답이 될 것이다.
“아무리 후진 인생이라도 상관없어.
살아 있기만 한다면.”
이야기가 계속되는 한 삶은 끝나지 않는다……
‘죽음’에서부터 ‘영감靈感’과 ‘음악’, ‘기억’에 이르기까지
농담인 척 들려주는 눈부신 생의 이면들
[헬싱키 로카마티오 일가 이면의 사실들]은 죽음과 소멸의 안타까운 뒤안길에서 조용히 그러나 충분히 제 목소리를 내는 희망의 찬란한 이야기들을 풀어놓는 소설집이다. 이미 [파이 이야기]를 통해 종교와 믿음이 퇴색된 현대사회 속에서 새로운 희망과 신념의 의미를 진지하게 묘파한 바 있는 작가 얀 마텔은 데뷔작인 이 소설집에서 같은 주제를 다양하게 변주한다. 그러나 마텔이 그리는 세계는 희망으로 가득 차 있는 밝은 곳만은 아니다. 오히려 다소 어둡고 쓸쓸한 편이다. 그가 파악하는 20세기의 역사는 피로 얼룩져 있고, 영혼을 뒤흔드는 협주곡을 작곡한 음악가는 세상의 인정을 받지 못해 청소부 신세다. 또 한 사형수는 교수형, 자살, 심장마비 등의 다양한 죽음을 겪지만 결코 구원을 받지는 못하며, 기억할 만한 아름다운 사랑을 나눈 부부는 남편의 죽음으로 인해 이별을 맞는다. 그러나 마텔은 이 끝 간 데 없는 죽음과 절망, 공허 속에서 희망을 발견해 독자 앞에 제시한다. 에이즈로 죽어가는 친구에게 바치는 우정과 헌신을 통해, 포화가 쏟아지는 베트남 전장에서 동료들에게 한 순간이나마 평화와 위로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음악가를 통해, 죽음을 앞둔 사형수가 어머니에게 사랑한다는 전언을 남기는 것을 통해, 남편을 잃었지만 소중한 기억 속에서 영원히 그를 보듬는 아내의 사랑을 통해.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피어나는 우정과 헌신의 감동적인 드라마
{헬싱키 로카마티오 일가 이면의 사실들}
표제작이자 유일한 중편이다. 에이즈로 죽어가는 친구 폴의 몸과 마음이 황폐해지는 것을 보다 못한 주인공 ‘나’는 친구의 영혼을 유지시키고,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에 공동으로 소설을 쓸 것을 제의한다. 두 사람이 만든 소설은 헬싱키에 사는 가공의 로카마티오 가족에 관한 것으로, 가족은 20세기 역사의 흐름에 따라 부침을 거듭한다. 한편, ‘나’와 폴은 로카마티오 일가의 이야기를 쓰기 위해 20세기 역사를 조사하면서 피로 얼룩진 20세기 역사와 에이즈로 부서져가는 폴의 상태가 유사하다는 점을 발견한다. ‘나’와 폴, 그리고 독자는 고통과 피와 눈물로 얼룩진 20세기 역사와 천형인 에이즈의 공포와 위력을 동시에 지켜보면서 비감에 젖게 된다.
그러나 과연 이 세계에는 절망만이 존재할까? 20세기 역사에도 모두의 축복을 받으며 태어난 다섯 쌍둥이의 탄생을 비롯한 아름다운 순간은 있었고, 에이즈로 고통받는 폴에게도 친구 ‘나’와의 우정이라는 소중한 마음이 있었다. 이 작품이 비극적이면서도 마냥 슬프지만은 않은 것은 우정과 헌신, 희망과 믿음이라는 가치들이 비극적 사건 이면에 깊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전쟁의 상흔을 음악으로 치유하는 베트남전 참전 용사 빌딩 청소부
{미국 작곡가 존 모턴의 〈도널드 J. 랭킨 일병 불협화음 바이올린 협주곡〉을 들었을 때}
대학 졸업을 앞둔 캐나다 학생이 워싱턴 D.C를 방문한다. 우연히 허름한 극장에서 열리는 콘서트에 참석하게 된 그는 그곳에서 영혼을 뒤흔드는 협주곡을 듣게 된다. 깊이 감동한 학생은 콘서트가 끝나고 협주곡의 작곡가이자 바이올린 연주자인 존 모턴이라는 음악가의 뒤를 무작정 쫓다가, 의외의 사실을 알게 된다. 존 모턴은 빌딩의 야간 청소부였던 것이다. 학생은 존 모턴과 대화를 나누며 그의 지난 인생에 대해 듣게 된다. 베트남 전쟁 참전 용사였던 존 모턴은 집중 포위 공격을 당하던 격전지 한복판에서 내면의 평화를 위해, 동료 병사들에게 위로와 안정의 한순간을 주기 위해 바이올린을 켰던 것이다. 가장 참혹한 절망의 순간에도 음악에 날개를 달아 숭고한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겠다는 존 모턴의 절절한 의지가 가슴을 깊이 울리는 명단편이다.
사형을 기다리는 한 죄수가 죽음에 이르는 여러 가지 방식들에 대한 보고서
{죽는 방식}
이 작품은 교도소장이 사형수의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글 형식을 띄고 있다. 교도소장은 18번째 편지부터 1096번째 편지에 이르기까지 많은 편지를 보내 사형수의 다양한 종말의 순간을 기록하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수록된 편지글의 기본 형식은 대동소이하며, 몇 가지 세세한 부분만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사형수에게 제공된 마지막 식사, 사형수와 신부와의 면담 시간, 교수대를 본 사형수의 반응, 마지막으로 죽는 방식 등이 그렇다. 사형수는 평온하게 교수형을 당하는가 하면, 형 집행 전에 자살하기도 하며, 공포로 인해 심장마비로 죽기도 한다.
이처럼 한 사형수에게 다가오는 다양한 방식의 죽음은 보편적인 인류의 그것을 상징한다고 봐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우리 인간들은 집에서 조용히 누워 죽음을 맞기도 하고, 사형을 당하기도 하며, 사고의 희생자가 되기도 한다. 확실한 것은 {죽는 방식}의 사형수처럼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것뿐이다. 이 작품에서 가장 돋보이는 장면은 교수대를 보자마자 심장마비를 일으키는 사형수에게 심폐소생술을 해주며 살리려고 기를 쓰는 의사가 나오는 부분이다. 얀 마텔 특유의 블랙유머의 진수를 보여주는 명장면으로 손색이 없다.
기억의 소중함, 그 아름다움에 관한 환상적인 이야기
{비타 애터나 거울 회사: 왕국이 올 때까지 견고할 거울들}
이 작품은 형식적으로 가장 독특하다고 할 수 있는 단편으로, 물건을 버리는 법이 없는 할머니와 물질주의를 경멸하는 ‘나’의 이야기다. 무엇보다 먼저 눈을 사로잡는 독특한 이 작품의 형식은 한 페이지를 세로로 분할해 왼쪽 면은 할머니의 이야기가, 오른쪽 면은 나의 이야기가 나란히 진행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실제 나누는 대화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책장에 재현해놓은 듯한 이런 형식은 얀 마텔의 기발한 실험 정신의 단면을 엿볼 수 있게 한다. 할머니의 잡동사니 속에서 우연히 찾아낸 거울 만드는 기계, 그런데 그 기계의 원동력은 누군가의 기억이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와의 첫 만남에서부터 안타까운 사별의 순간까지를 담담하게,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이별의 순간에는 격정적으로 토로한다. 기억이 더해질수록 기계는 요란하게 돌아가고 마침내 매끄러운 은빛 거울이 완성된다.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는 ‘나’는 인간적인 것 이외에는 바라지 않고, 소유의 노예가 되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물질 혐오자이다. 그러나 소중한 기억이 거울로 재탄생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모든 물질에는 사용자의 기억이, 그 영혼이 스미어 있음을 배우게 된다. 일종의 환상소설에 가까운 신비로운 분위기에 여운이 오래 남는 보석 같은 단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