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엔 북극에 갑니다
도시 속 인간의 시선에서 얼마간 벗어나 뭇 생명의 그것을 바라보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삶의 익숙한 풍경들의 가능성, 그 기쁨과 고단함이 새삼 놀랍게, 그러다가 문득 한없이 대수롭지 않게 여겨진다. 스케일을 달리하며 삶을 성찰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경험을, 극지 생태 연구자의 북극 탐험기인 이 책은 북극이라는 경외스런 자연을 통해 가능하게 한다.
북극해와 맞닿은 그린란드의 북쪽 끝…
가장 짧은 여름, 가장 위대한 생명의 시간을 기록하다
회색늑대에서 북극황새풀까지
지구의 끝에서 펼쳐지는 경이로운 자연의 일상
여름엔 북극에 갑니다? - 어떤 특별한 계절에 관하여
북극의 여름은 조금 특별하다. 그것은 단지 해마다 찾아오는 계절이 아니라, 모든 이야기의 시작이 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동토의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생명이 북극의 짧은 여름을 기다린다. 그리고 마침내 여름이 오면 지의류, 선태류부터 시작해 각종 풀과 꽃이 피어나고, 그것을 먹고 사는 북극토끼, 레밍, 사향소 들이 부지런히 움직인다. 지구 저편의 머나먼 땅에서 날아온 새들도 둥지를 틀고, 새끼를 보살피며, 깃갈이를 하고 다시 긴 여행을 준비한다. 이들을 먹이로 삼는 북극여우, 회색늑대에게도 여름은 반가운 시간이다.
북극의 동식물들은 짧디짧은 그곳의 여름을 그저 흘려보내기만 하지 않는다. 그 순간이 생명의 시간임을 잊지 않고, 모든 여름을 처음이자 마지막인 것처럼 정성을 다해 보낸다. 차가운 바람에 찢어질 듯 꽃잎을 흩날리는 스발바르양귀비도, 난생처음 보는 인간의 텐트에 찾아와 잔뜩 굶주린 얼굴로 쓰레기봉투를 물어뜯어놓은 회색늑대들도 예외는 아니다. 그래서 이 책은 ‘북극의 여름’에 관한 책이면서, 한편으로 삶을 대하는 자세에 관한 책이기도 하다. 도시 속 인간의 시선에서 얼마간 벗어나 뭇 생명의 그것을 바라보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삶의 익숙한 풍경들의 가능성, 그 기쁨과 고단함이 새삼 놀랍게, 그러다가 문득 한없이 대수롭지 않게 여겨진다. 스케일을 달리하며 삶을 성찰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경험을, 극지 생태 연구자의 북극 탐험기인 이 책은 북극이라는 경외스런 자연을 통해 가능하게 한다.
인간이 한 번도 거주한 적 없는 땅,
한국인으로서는 처음 찾은 그린란드 난센란에서 써내려간
40여 일의 생태 탐사 일기
남극에서 펭귄을 연구하던 저자는 두 번의 여름 북극의 생태를 연구할 기회를 얻는다. 그것도 그냥 북극이 아니라 위도 82도―그린란드 최북단에 위치한 난센란Nansenland. 이제껏 인간이 거주했다는 기록이 전혀 없는 곳이다. 다큐멘터리, 야생도감에서 수십 번도 넘게 본 사향소와 북극곰의 땅이다. 세계 최대의 국립공원이라는 북동그린란드국립공원Northeast Greenland National Park 내에 있는 난센란은 극지의 생태를 그대로 간직한 곳이다. 그래서 암스테르담/헬싱키-오슬로-스발바르 등을 거쳐 비행기를 네다섯 번 갈아 타야 하는 여정도 고되지만, 방문 허가를 받는 과정도 여간 까다롭지 않다. 인간이 산 적 없고, 살지 않는 곳이기에 어렵게 그곳을 찾아서도 고된 여정은 계속된다. 캠프를 차리고, 화장실도 만들고, 물도 길어 와야 한다. 궂은 날은 여럿이고, 언제 인간을 공격할지 모르는 대형 포유류들은 캠프를 에워싸고 있다. 그런 가운데도 매일 새로운 자연을 만나고, 그것을 점차 이해해간다. 그래서 이 여정은 ‘모험’이라는 말과 잘 어울린다.
조류를 연구하는 동물행동학자인 저자, 그리고 지질학자인 나머지 다섯 명의 과학자들과 함께 떠나는 북극 여정은 북유럽의 피오르드와 오로라를 떠올리면 쉽게 연상되는 여느 고위도 관광지의 풍경, 그곳에서 만난 흥미진진한 사람들과의 유난한 인연과는 사뭇 다르다. 광활한 동토와 그 끝으로 이어진 북극해, 뾰족하고 납작하고 창백한 빙하와 해빙, 나무 한 그루, 길 한 자락 없이 울퉁불퉁 펼쳐진 산, 바다로 흘러드는 차디찬 호수……. 저자는 이 고요한 풍경 속을 거닐며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쉽게 알아채기 어려운 또 다른 세상으로 우리를 이끈다. 그곳은 발밑에 35억 년 된 변성암이, 머리 위에는 해마다 남극과 북극을 오가며 지구 한 바퀴는 도는 북극제비갈매기가 있는 세상이다.
캠프를 차리고 본격적으로 탐사를 시작하니, 걸음걸음이 조심스럽다. 새끼를 보호하려는 긴꼬리도둑갈매기, 세가락도요, 흰죽지꼬마물떼새 들은 둥지 가까이로 다가가면 날카로운 경계음을 낸다. 발걸음을 옮겨 다른 쪽으로 걸으면 저 멀리 사향소가 보인다. 커다란 뿔, 치렁치렁한 털 뭉치의 거대한 몸집은 당당하던 걸음도 주춤하게 만든다. 그 위압감에 멈칫하면서도 좀더 가까이서 보고 싶은 욕심이 동시에 인다. 경계심이 매우 강한 북극토끼는 한번 가까이서 보려면 몇 시간씩 야금야금 기며 줄다리기를 해도 달아나기 일쑤다. 그러다 한눈을 팔면 어느새 어딘가에 다시 나타나서 풀을 뜯고 있다. 여름을 맞아 짙은 갈색으로 털색을 바꾼 북극여우는 어린 새를 물고 총총거리며 걷는다. 고기 냄새를 맡고 텐트 코앞까지 찾아온 회색늑대는 거대하고 사나우리라는 예상과 달리 왜소하고, 인간에게 공격적이지도 않다. 북극 지역에서만 관찰된다는 희귀 조류여서 ‘마법의 새’로 불리는 북극흰갈매기는 새하얀 깃털에 케첩을 묻힌 채 공군 기지에서 인간이 남긴 음식을 먹고 있다. 분홍발기러기는 북극여우 등 육상의 포식자를 피해 바다 위 해빙에서 깃갈이를 한다고 알려져 있었지만, 육지에서도 먹이를 먹고 영양을 보충했다. 긴꼬리도둑갈매기는 인지 능력이 띄어나서, 함께 실험을 진행한 꼬까도요나 세가락도요와 달리 인간이 살지 않는 땅인 그린란드 최북단에서조차 인간을 개체 수준에서 구분했다.
이렇게 저자가 만난 북극의 풍경은 그간 봐온 다큐멘터리나 도감의 것과 같은 듯하면서도 조금씩 다르다. 그 차이는 자연을 직접 만나는 경험의 흥미로움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끔 한다. 있는 그대로의 풍경, 소리와 몸짓을 담은 이 책에는 그간 극적으로 각색된 자연 다큐멘터리로만 봐오던 대상을 실제로 마주했을 때, 딱 그만큼의 간극―혹은 재미―들이 존재한다. 페이지마다 등장하는 북극의 풍경과 북극 동식물의 모습을 담은 사진들도 마찬가지다. 사향소 싸움, 텐트 주변을 어슬렁거리다 엉뚱하게 눈이 마주친 회색늑대, 굴 밖으로 빼꼼 고개를 내민 레밍, 새끼를 보호하려 이상한 자세로 날고 헤엄치는 새들, 새에 관심이 없었다면 무심코 밟고 지나쳤을 흰올빼미 깃털까지…… 드론 등 첨단 장비로 촬영한 고해상도 사진들은 익숙한 아름다움을 낯선 시선으로 조망한다. 한편 영하 270도에서도, 우주 공간에서도 죽지 않는다는 0.5밀리미터의 완보동물부터 파충류와 설치류 등 각종 동물과 지의류, 선태류, 다양한 식물종과 화석, 암석에 이르기까지 이 책에 등장하는 여러 조연들도 북극을 읽는 재미를 한층 더해준다. 여기에는 당연히 호모사피엔스인 여섯 과학자의 사사로운 일상도 담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