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거리
희미한 거리거리를 순례하며 소생시키는 빛나는 청춘의 공간
무너져버린 폐허 속에 남겨두어야 했던 "나"를 찾는 먼 여행
영국 추리소설 작가 앰브로즈 가이즈는 7월의 어느 일요일, 이십 년 만에 파리를 찾는다. 집필해오던 시리즈와 관련한 새로운 계약을 맺기 위해 이곳에 온 그는, 문득 자신이 스무 살 때까지 파리에 살다 이곳을 떠나게 되었음을 고백한다. 폭격을 피해 모두가 떠나버린 듯한 텅 빈 도시에서, 중년의 앰브로즈 가이즈는 다시 이십 년 전 장 데케르라는 이름의 스무 살 프랑스 청년이 되어 자신의 과거를 추적해나간다. 옛 추억을 더듬던 그에게 찾아드는 파리의 수많은 거리와 반딧불처럼 나타났다 사라지는 얼굴들…… 폐허가 된 과거에 자신을 홀로 남겨두고 도망치듯 떠나야 했던 그는 잃어버린 거리,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자기 인생의 수사관이 된다.
“그 시절 파리는 내 심장의 고동과 일치하는 도시였다.”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파트릭 모디아노
잃어버린 시간과 공간, 그리고 ‘나’를 찾는 절망적 탐구
모디아노의 소설은 나직하고 끊어져 쉬는 데가 많은 옛 노래, 지금은 다 잊은 줄 알았다가도
다시 들으면 가슴속 저 깊은 곳에서 마음의 현이 오래오래 진동하는, 그런 노래와도 같다.
_옮긴이의 말
무수히 변주를 거듭하면서도 끊임없이 독자를 사로잡는
인상주의 화풍의 모디아노 소설
바스러지는 과거, 잃어버린 삶의 흔적으로 대표되는 생의 근원적 모호함을 탐색해온 현대 문학의 거장,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파트릭 모디아노의 열번째 장편소설 『잃어버린 거리』가 문학동네에서 새롭게 출간됐다. 『잃어버린 거리』는 파트릭 모디아노의 작품활동이 무르익기 시작한 80년대, 즉 1984년 발표된 작품으로, 1988년 책세상 출판사를 통해 맨 처음 국내에 소개되었다(『더 먼 곳에서 돌아오는 여자』). 그리고 2018년, 그동안 모디아노의 다양한 작품을 꾸준히 선보여온 문학동네에서 ‘현재’의 독자들의 감각에 맞춰 보다 산뜻하고 새롭게 번역을 다듬고 옷을 갈아입혔다.
“파트릭 모디아노의 소설은 인상주의 화가들의 그림과 닮은 데가 많다”고 번역자 김화영 교수는 말한다. 사물보다 빛의 역할이 점점 중요해진 인상주의처럼, 모디아노의 소설에서는 인간의 행위보다 그를 둘러싼 시간과 공간이 중심이 되는 경우가 많다. 같은 대상을 각기 다른 시간에 반복하여 그리는 행위를 통해 항상 변하는 빛 그 자체를 그리려 노력했던 인상주의 작가들처럼, 모디아노 또한 비슷한 방법으로 시간과 공간을 포착해내려 한 작가라고 할 수 있다. 그의 많은 작품 속에서 인물의 행위는 시간의 힘을 드러내고, 삶을 담는 그릇, 공간을 드러낸다. 소설 속 수많은 고유명사들은 “영혼의 주름 주름에 은연중 살며시, 그러나 깊숙이 스며들어 떨”리고, 그 떨림이 소설이라는 아름답고 슬픈 공간을 완성한다.
모디아노의 많은 작품이 언뜻 엇비슷해 보이면서도, 오랜 시간이 흐르도록 저마다 마력과도 같은 고유의 힘을 갖는 이유는 모디아노가 “어떤 장소의 형언하기 어려운 분위기를 살려내는 천재”(옮긴이의 말)이기 때문이다. 독자는 그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모디아노 특유의 나직하고 억제된 슬픔의 목소리가 만들어낸 세계”(옮긴이의 말)에 어느새 깊이 빠져들게 된다. 제각각 오묘한 매력을 발산하는 인상주의 회화 작품처럼 모디아노의 소설이 오랫동안 끊임없이 수많은 독자들을 매료해온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희미한 거리거리를 순례하며 소생시키는 빛나는 청춘의 공간
무너져버린 폐허 속에 남겨두어야 했던 ‘나’를 찾는 먼 여행
7월의 어느 일요일, 영국 국적의 한 남자가 프랑스 입국을 앞두고 세관 검사대 앞에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그는 자신의 여권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문득 어릴 적 발부받은 남색 표지의 프랑스 여권을 떠올린다. 분명 한때 프랑스인이었을 그가, 호텔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 운전사가 프랑스어로 말을 걸까봐 겁을 내고, 공항에 도착해 프랑스어 말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이상한 기분을 느낀다. 모국어가 낯설어질 정도로 그는 아주 어릴 적, 아주 오래전 프랑스를 떠났던 걸까?
그러나 파리 시내로 들어온 그에게 이 도시 풍경은 조금도 낯설지 않은 듯하다. 샹페레 시문, 말제르브대로, 카스틸리온가街, 튈르리공원, 콩코르드광장, 루아얄 다리…… 그는 한눈에 이 모든 지명을 자연스레 떠올리고, 오히려 세세하게 달라진 거리의 모습을 찾아낼 만큼 이 도시를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다만 그는 센강 건너편 자신이 어린 시절을 보낸 지역은 둘러볼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발길을 돌린다.
“인생이란 앞뒤로 이어진 여러 주기들의 연속이랄까요…… 그래서 이따금 ‘출발점’으로 되돌아와보기도 하지요. 파리에 돌아오면서부터 이제 앰브로즈 가이즈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느낌이에요.” (25쪽)
그는 영국에서 앰브로즈 가이즈라는 이름의 추리소설 작가가 되었다. 여덟 편이나 되는 시리즈물을 여러 나라에 번역 출간할 만큼 작품은 성공을 거두었고, 드라마 제작 판권 등 계속해서 새로운 계약을 맺기 위해 그는 파리에 돌아온 것이다. 편집자를 만나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이야기를 나누던 그는 문득 자신이 스무 살 때까지 죽 이곳에 살았음을 고백한다. 그리고 편집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젊은 시절의 사연이 새겨진 이 도시에, 폭격을 피해 모두가 떠나버린 듯한 텅 빈 도시에 며칠 더 머물기로 마음먹는다.
호텔로 돌아온 장 데케르는 이 도시에 살았던 자신의 유일한 흔적이라 할 수 있는 공책 한 권을 펼친다. 그리고 그 안에서 옛 친구 다니엘 드 로크루아의 편지를 발견한다. 우연히 산 소설 뒤표지에서 그의 사진을 알아보고 십 년 전 출판사를 통해 보내온 편지였다. 로크루아는 그의 독자가 되었다며 영국으로 건너가 작가 앰브로즈 가이즈로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 그를 축하했고, 그의 과거에 대해서 침묵하겠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덧붙인다.
지금까지 이곳에서는 그 누구도 당신이 앰브로즈 가이즈가 되어 있다는 것을 모르오. 프랑스의 어떤 계몽철학자가 말했듯이 “우리들은 종종 어떤 침묵 덕분에 살아가고 있소.” 나의 침묵을 믿어 의심치 마시오.(37쪽)
다니엘 드 로크루아의 편지를 통해 독자는 이십 년 전 장 데케르라는 이름의 스무 살 프랑스 청년이 어떤 특별한 사연을 안고 프랑스를 떠나 자신의 과거를 지운 채 앰브로즈 가이즈라는 영국 작가가 되었음을 짐작한다. 하지만 장 데케르는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소설 속에서만큼은 과거 파리에서의 경험과 그곳에서 알고 지낸 인물들을 등장시킨 듯하다. 로크루아는 소설 속 자신을 닮은 인물을 언급하며 ‘자신은 아직 소설 속 그 변호사처럼 자살하지는 않았다’는 말을 편지에 적었다. 그리고 그 편지를 받고 오 년이 지난 어느 날, 앰브로즈 가이즈는 로크루아의 자살 소식을 접하고, 다시 오 년 후 이곳 파리에서 또다시 그 신문기사 조각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자신의 소설에서처럼 스스로 생을 마감해버린 옛 변호사 친구 다니엘 드 로크루아 생각을 떨치지 못하고, 이십 년 전 장 데케르가 되어 과거에 누비던 이 도시의 거리거리를 순례하며 자신의 과거를 추적해나간다. 그리고 옛 추억을 더듬던 그에게 파리의 수많은 거리와 얼굴들이 찾아들고, 반딧불처럼 나타났다 사라진다.
이십 년 전 청춘의 시절, 장 데케르에게 어떤 사연이 있어 “돌아오게 되리라는 생각은 못한 채” 떠나버렸던, 이제는 아무도 남지 않은 폐허와 같은 공간으로 돌아와 그토록 망각하려 애쓰던 지난 시절을 되살려내려는 것일까. 그가 빛나는 청춘을 함께 보냈던 수많은 인물들―다니엘 드 로크루아, 기타 바티에, 베르나르 파르메르, 탱탱 카르팡티에리, 조르주 마요, 헤이워드 부부, 뤼시앵 블랭과 카르멘 블랭―은 모두 어디로 사라져버린 것일까. 그가 그 잃어버린 시간, 잃어버린 공간 속에서 찾아내려 하는 것은 결국 ‘장 데케르’라는 자기 자신뿐인지도 모른다.
모디아노의 작품 속에서 공간은 놀랄 만큼 자세한 반면 시간은 매우 흐릿하고 불확실하다.
모디아노는 거리를 거닐고 모든 것을 관찰하고 기록하며
기억이라는 자신만의 영역에서 그 스스로 수사관이 된다. _베르나르 피보(문학평론가, 공쿠르상 심사위원)
모디아노는 초기작에서부터 한결같이 ‘아이덴티티’에 천착해왔다. ‘나’의 정체를 묻는 집요한 질문은 추리소설적인 흥미를 불러일으키며 독자의 관심을 잡아둔다. 다만 범행 동기나, 범죄자를 쫓는 보통의 추리소설과는 달리, 추적의 대상은 잃어버린 시간과 공간 속 ‘나’의 아이덴티티인 것이다. 『잃어버린 거리』 역시 ‘나’의 아이덴티티를 탐구한다. 소설 속 장 데케르라는 화자 역시 “스스로 수사관이 되어” “기억이라는 자신만의 영역에서” 과거를 추적한다.
“당신의 인생 초년기를 지켜봐온 그 모든 사람들이 차츰 사라져가고 있어요. 당신은 아주 젊을 때 그 사람들을 알게 되었지만 그들은 그때 이미 인생의 황혼기였으니까요……”(163쪽)
이 탐구의 과정은 시간의 파괴력 때문에 곧잘 ‘절망적’인 것이 된다. 이십 년 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은 파리라는 동일한 공간에서 앰브로즈 가이즈는 문득 장 데케르의 모습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현재와 과거라는 두 시점 사이에는 이십 년이라는 긴 세월이 가로놓여 있고, 그의 잃어버린 과거에 대해 증언을 해줄 수 있는 사람조차 남아 있지 않은 삭막한 도시에서 이 거리를 건너지르는 행위는 때때로 현기증을 일으킬 만큼 아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