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의 사생활
이 책은 신경외과 의사가 비범한 그림 솜씨로 병원 속 사람들을 그린 기록이다. "우리 엄마 왜 이렇게 부었죠, 선생님?" 하고 아이가 의사에게 묻는다. 의사는 생각한다. "아, 이 환자 원래 이 얼굴이 아니었겠구나." 저자는 수술이 끝나거나 잠깐의 틈이 날 때 이런 대화를 반추하면서 자신에게 극(劇)적으로 다가온 삶의 표정을 기록으로 남겼다. 1000일의 레지던트 생활 동안 고작 70컷을 그렸으니 그 기록 곳곳엔 구멍이 많다. 하지만 기록으로써 시간을 붙잡지 않으면 지난 삶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갈 것만 같았다. 더구나 이제 전문의라는 또 다른 단계를 앞둔 이로서는 하나의 과정에 대한 매듭을 지을 필요가 있었다.
글쓰기는 단순한 기록만이 아니다. 의학적 지식과 경험에 대한 숙달 과정에서 글쓰기로 매듭짓는 것은 하나의 새로운 사유를 발생시킨다. 타인(환자와 보호자)의 마음을 읽고 그들의 불안한 동공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는 일은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한다. 환자를 관찰하고, 상상했던 일은 조금이라도 그들의 마음을 들여다보도록 만든다.
"일기"는 자아의 기록이기도 하지만, 그 시선은 환자와 보호자의 뇌 속을, 타인의 삶이라는 바깥을 향하게 만든다. 수술이라는 고도의 테크닉은 단지 봉합으로만 마무리되지 않고 새로운 삶을 열어젖힌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은 바로 "병원"이라는 거대한 공간에서 탄생한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 환자이고 보호자일 것이다……
지난 4년간 신경외과 의사가 수술대 위에서 남긴 기록
당신은 어떤 의사가 되고, 어떤 환자가 될 것인가?
그의 손때 묻은 노트를 받아들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그림들은 내가 수없이 보던 병원의 낯익은 풍경을 대상으로 했지만, 분명 그만이 바라보는 시점에서 정밀하게 포착되고 강조되어 흡사 다른 광경을 묘사한 듯한 기시감을 주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람들이 늘 보거나 겪는 일을 다른 시선으로 기록하는 사람을 작가라고 부른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신경외과의 고된 수련 속에서 이미 작가로 움트고 있었다. 그가 덧붙인 글은 힘겨운 수련생활을 긍정적으로 견디고 환자를 따뜻한 마음씨로 사유하는, 그의 작가적 시선을 이해할 수 있는 덤이다. 이 책은 기록하는 의사의 시점에서 쓰인 또 한 권의 중요한 책이 될 것이다._남궁인 응급의학과 의사, 『만약은 없다』 저자
처음 보게 된 이 작가의 드로잉은 응급실 침대에 모로 누워있는 어떤 환자의 발 그림이었다. 나도 모르게 생각했다. ‘언젠가 내가 병원에 입원하게 된다면, 이런 시선으로 나를 봐주는 의사에게 치료받고 싶다.’ 지나치며 본 것을 그리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드로잉의 시작은 조금 더 다가앉는 일이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어떤 것을 오래 들여다보고 있으면 정작 그것의 생김새보다 내가 그것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를 더 느끼게 된다. 그래서 드로잉은 그린 사람의 시선을 빌려서 세상을 바라보는 즐거움을 준다. 나는 이 의사의 드로잉 실력에 대해 생각하기 이전에 그의 시선에 바로 반해버렸다. 이런 그림을 그리는 의사니까. 그가 왕진을 와 준다면 왕진가방 안에는 아마도 다른 의미의 청진기와 체온계가 들어있겠지. 그러니까 그의 책이 나온다면 마음이 앓을 때 읽도록 하자._이종범 만화가, 『닥터 프로스트』 저자
병원―각자의 삶이 모인 거대한 공간
병원은 생사를 다투는 이들이 실려와, 단 1분이라도, 아니 단 몇 초라도 더 빨리 수술대에 오르기 위해 사력을 다하는 공간이다. 병원만큼 초를 다투는 급박함과 간절함이 삶의 리듬을 지배하는 곳이 있을까? 누군가는 다행히 살아남고, 누군가는 속절없이 삶을 끝내는 곳. 죽음은 공기처럼 스며들고, 형이상학적 사고는 사치스러울 만큼 이곳을 지배하는 것은 바로 ‘육체’다. 정신은 이 육체를 보존하거나 붙잡거나 지탱하기 위해 왜소해져서 사투를 벌인다.
감정은 넘실거린다, 병원이 낯선 환자와 보호자들 사이에서는. 한 번도 삶을 헤집어놓을 만큼 큰 병을 앓거나 목격하지 못했던 이들은 의사에게 두 손 모아 매달리거나, 아니면 의사를 탓한다. 의식을 잃고 실려온 60대 엄마를 바라보는 자식의 불안과, 중환자실에서 뇌종양을 앓는 0살의 아기를 지켜보는 부모의 좌절은 병원의 공기를 더없이 무겁게 만든다.
한편 병원은 루틴(routine)이 지배하는 곳이기도 하다. 인턴과 레지던트들은 퇴근이 없는 일상을 이어가고, 환자들은 불편하고 시끄럽고 쾌적하지 못한 6인실에서 하룻밤에 5만원의 비용을 내며 잠들고 깬다.
환자, 보호자, 의사는 병을 매개로 만나 일상을 함께하며 이곳만의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하지만 이들은 이곳에서 다시 보지 않는 게 서로 좋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용인한다. 통증은 불현듯 끼어들어 삶을 헝클어놓지만, 그것이 치유되는 순간 죽음과 아픔에 대한 기억은 엷어지며 곧 일상을 되찾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어서 빨리 나아서 병원을 찾는 일이 없기를……’이란 바람을 갖지 않는 환자 혹은 의사는 없을 것이다.
수술―신경외과 의사라는 극한의 직업
널리 알려진 대로, 의대 6년 과정을 마친 이들은 일천한 경험으로 생사를 가르는 일에 뛰어들 순 없어 교육병원에서 수련 과정을 거친다. 한 달에 한 과씩 도는 인턴생활 1년과, 그 후 특정 과에서 이어지는 레지던트(전공의) 과정 4년.
그중 신경외과는 병원의 26개 과 중에서 가장 고되고 힘든 과로 꼽힌다. BBC에서 극한의 직업 10군에 포함시키기도 한 분야가 바로 신경외과다. 복잡한 뇌를 다루고 무엇보다 수술이 많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는 의대생 시절부터 자신을 찾아온 낯선 환경을 기억한다. 온도를 한껏 낮춘 차가운 방에서 이어지는 수술은 그에게 맞지 않았고, 입원 중이던 환자가 갑자기 경련을 일으키거나 중환자실 환자가 갑자기 호흡 곤란을 겪어 수술방에 들어가게 되는 날이면 몸과 마음은 너덜너덜해졌다. ‘병원의 먼지’라 불릴 만큼 존재감이 없던 인턴 시절, 100일 동안 단 한 번의 외출도 없이 당직을 서야 했고, 레지던트가 되어서는 일주일에 두 번의 ‘오프’(퇴근하는 날)로 버텨왔다. 즉 전공의는 스스로의 육체와 정신을 연소시켜 지식을 얻고 치병(治病)을 연마하는 과정이었다.
수술을 하지 않아도 될뿐더러 다른 사람의 정신(마음)이 궁금해서 오로지 정신과 의사만을 목표로 의대생 시절을 보냈건만, 현재 그는 180도 반대편에 있는 ‘상(上)수술과’인 신경외과 의사가 되었다. 마취된 환자의 뇌와 혈관을 만지며 종양을 제거하고, 수많은 사망 판정을 내리며, 응급 수술이 끝난 뒤에는 툭툭 튄 피가 묻은 자기 얼굴을 직면해야 한다.
하지만 농도 짙은 4년의 전공의 과정은 그에게 뇌를 만지는 신경외과와 마음을 만지는 정신과가 결국 같은 것임을 알게 해줬다. 인간을 인간이게 만드는 것이 바로 ‘뇌’니까.
시선―감정을 짊어지는 의사
신장 질환으로 수십 년을 투석하며 살도 눈빛도 푸석푸석하게 변해버린 노인 환자에서부터 헬스 트레이너로 이제 막 사회에 발을 들인 20대 후반의 청년까지, 심지어 유치원에서 뛰놀던 다섯 살 아이에게까지 찾아오는 뇌출혈이라는 사태는 대상을 가리지 않기로 유명하다. 병에 직면한 환자는 묻는다. ‘내가 뭘 잘못했기에 이렇게 가혹한 일이 벌어졌나?’ 나약한 보호자들은 자책한다. 자식인데 진작 엄마의 높은 혈압을 조절해드리지 못했고, 얼마 전부터 머리 아프다고 말한 남편을 병원에 데리고 오지 못했다고. 진즉에 건강 검진을 받게 했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이 순간 의사는 보호자들이 자책하는 일이 없도록 매우 조심스럽게 설명해야 한다. ‘뇌출혈은 갑작스레 발생하며, 사전에 발견하기 어렵고, 누구에게나 나타날 수 있습니다. 스스로를 탓할 게 아닙니다.’
죽음을 피부처럼 맞대고 사는 것이 의사다. 가망 없는 환자의 보호자에게 ‘낫는 것을 목표로 하기보다는 더 나빠지지 않는 데서 만족하자’고 설득해야 하며, 자식의 죽음으로 인해 슬픔에 빠진 부모에게 다른 사람을 살릴 기회라며 장기를 기증하라고 설득해야 한다.
어느 평화로운 일요일 아침, 응급실에 실려온 어린아이는 수술을 받았지만 끝내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고, 아이는 회복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다. 그는 ‘뇌사 상태’임을 부모에게 알려야 했지만, 이 말만큼 의사를 바닥없는 무력감으로 빠지게 하는 것도 없었다.
“장기 기증을 알리는 것은 의사에게 의무입니다…….”
“선생님께서 우리 아이가 살아날 가능성이 없다고 한다면 정말 그렇겠지요. 장기 기증을 하겠습니다.”
환자가 뇌사 추정 상태에 이르면 의사는 의무적으로 한국장기기증원에 보고하고, 의사와 보호자 그리고 코디네이터는 그 기증 절차에 대해 논의한다. 장기 기증 동의가 이뤄지면 이 환자가 정말 뇌사 상태에 처한 게 맞는지 판정에 들어가고, 뇌사가 확인되면 사망 선언 후 기증 절차를 밟을 수 있다. 환자의 건강한 삶을 연장하는 게 목적인 의사에게 누군가의 삶이 끝났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정말 피하고 싶은 일이다. 그렇지만 중환자실을 담당하는 의사에게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일이고, 죽음을 설명하는 것 또한 비껴갈 수 없다.
생-로-사가 아니라 생-로-병-사라고 하듯, 병은 삶의 한 흐름이다. 하지만 인류 역사와 궤를 같이하는 병은 환자뿐 아니라 환자를 둘러싼 많은 사람을 지치고 괴롭게 한다. 환자 상태가 좋아지지 않으면, 의사는 자신의 몫과 과오에 대해 늘 질문한다. 혹시 내가 한 시술이 영향을 주지는 않았을까? 내가 한 소독이 부실하진 않았을까? 내가 한 부정적인 설명이 의식 없는 환자의 귀에 들어간 것은 아닐까? 보호자들도 마찬가지다. 내가 이 병원을 선택했는데, 내가 수술 동의서에 서명했는데, 아프다고 할 때 좀더 일찍 올걸, 엄마가 그 병으로 돌아가셨는데 우리 형도 미리 건강검진을 해볼 걸 하는 후회와 함께 치료는 시작된다.
각자가 떠안은 짐은 때론 너무 무거워 분노, 포기, 짜증과 같은 감정들을 실어 나른다. 과연 의사의 몫은 어디까지일까? 그 감정들까지 하나하나 어루만지는 게 의사가 해야 할 일이 아닐까? 환자나 보호자가 병원을 하나의 ‘정비소’쯤으로 여길 때 그 정비소를 병원으로 자리매김하도록 하는 것은 바로 환자의 짐을 나눠 갖는 의사들에게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기록―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이유
글쓰기는 자신이 약자임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된다. 글쓰기는 자아(ego)의 허물을 되돌아보는 일이기도 때문이다. 아직 완벽하지 못한 의술, 숙련되지 못한 태도, 사람의 목숨 앞에서 무뎌지는 감정을 일상적으로 겪는 의사들은 불완전한 에고를 맞닥뜨리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저자로 하여금 글을 쓰게 하고 그림을 그리게 했다.
이 책은 신경외과 의사가 비범한 그림 솜씨로 병원 속 사람들을 그린 기록이다. “우리 엄마 왜 이렇게 부었죠, 선생님?” 하고 아이가 의사에게 묻는다. 의사는 생각한다. ‘아, 이 환자 원래 이 얼굴이 아니었겠구나.’ 저자는 수술이 끝나거나 잠깐의 틈이 날 때 이런 대화를 반추하면서 자신에게 극(劇)적으로 다가온 삶의 표정을 기록으로 남겼다. 1000일의 레지던트 생활 동안 고작 70컷을 그렸으니 그 기록 곳곳엔 구멍이 많다. 하지만 기록으로써 시간을 붙잡지 않으면 지난 삶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갈 것만 같았다. 더구나 이제 전문의라는 또 다른 단계를 앞둔 이로서는 하나의 과정에 대한 매듭을 지을 필요가 있었다.
글쓰기는 단순한 기록만이 아니다. 의학적 지식과 경험에 대한 숙달 과정에서 글쓰기로 매듭짓는 것은 하나의 새로운 사유를 발생시킨다. 타인(환자와 보호자)의 마음을 읽고 그들의 불안한 동공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는 일은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한다. 환자를 관찰하고, 상상했던 일은 조금이라도 그들의 마음을 들여다보도록 만든다.
‘일기’는 자아의 기록이기도 하지만, 그 시선은 환자와 보호자의 뇌 속을, 타인의 삶이라는 바깥을 향하게 만든다. 수술이라는 고도의 테크닉은 단지 봉합으로만 마무리되지 않고 새로운 삶을 열어젖힌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은 바로 ‘병원’이라는 거대한 공간에서 탄생한다.
풍경들-병원이란 곳에서의
#1.
“우리 엄마 왜 이렇게 부었죠, 선생님?”
‘아, 이 환자 원래 이 얼굴이 아니었겠구나.’
저자가 일하는 곳은 환자가 걸어 들어와 누워 나가는 일이 비일비재한 신경외과다. 의사들은 쏟아지는 중환자들을 치료하며 뇌출혈, 뇌종양 같은 험악한 질병에, 그 질병에 따라붙는 수술과 후유증에 익숙해진다. 병이 생활 속에 자리 잡고 아픈 사람들도 아픈 모습 그대로 일상의 풍경이 된다. 저자가 본격적으로 이 그림일기를 그리게 된 것은 응급실에서 이동식 침대에 누워 있는 한 두통 환자의 벌거벗은 발을 본 후라 한다. 그는 이 모습을 보고, 환자가 수치심을 잊을 만큼 고통스러워한 그 심경을 단박에 간파해내지 못하도록 무뎌진 자신을 끔찍하게 여겼다. 그런 자신을 잊지 않기 위해 그 장면을 그림으로 남긴 것이 기록의 시작이다.
#2
“선생님, 다른 방법이 없을까요?
정말 가망이 없나요?”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저었다.
그 눈을 마주볼 수가 없어 고개를 떨궜다.
이 책의 그림에는 손이 자주 등장한다. 그중에는 수술을 하는 외과의사로서의 손도 있고, 그림을 그리는 손도 있다. 또 그 앞에서 공손히 손을 모았던 보호자의 손도 있다. 마치 높은 사람을 대하듯, 보호자들은 의사 앞에서 공손하게 두 손을 모으고 그의 말을 경청한다. 이것도 모자라 때로는 두 손을 비비며 매달린다. 그의 나이를 훌쩍 넘긴, 누군가의 배우자이고 부모인 보호자들이 ‘살려주이소’ 하며 새파랗게 어린 의사에게 사정한다. 그는 자신이 의사라는 이유로 자신의 앞에서 모아진 그들의 두 손을 그림으로 남겼다. 그 손에 담긴 마음을 잊지 않기 위해서다.
#3.
“의사 만들어줘서 고맙습니다. 잊지 않을게요.”
의사가 되어보니 자신은 〈하얀 거탑〉의 장준혁, 〈외과의사 봉달희〉의 봉달희는커녕 비닐봉다리만도 못한 의사더라고 자조하는 저자의 하루하루 일기에는 의사로서가 아니라 한 생활인으로서의 소회도 담겨 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는 나날들과 그저 지쳐서 누워 있고 싶은 순간들에 대한 단상들이 흰 가운 아래 숨겨진 한 사람을 드러낸다.
그러나 그 스스로가 어떻게 생각하든, 우리가 그의 기록에서 발견하는 것은 그의 말마따나 ‘감정을 짊어지는 의사’ 혹은 적어도 ‘감정을 짊어지려는 의사’다. 고통에 대한 공감을 무디게 만들지 않으려 그가 기록한 글과 그림에서, 추석 연휴 집에 가지 못하는 환자들을 위해 드레싱 카트에 초코파이를 싣고 다니며 환자들에게 건네고, 아침 소독 시간마다 환자와 이야기를 나누다 눈물을 흘리고, 간호사들에게 자신을 의사 만들어줘서 고맙다며 일일이 편지를 쓰는 그의 모습에서, 우리가 그가 병동을 환자가 들고 나는 곳이 아니라 ‘사람이 사는 곳’으로 만드는 의사임을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