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건국 잔혹사
1392년 그날, 정몽주와 이방원은 결코 만나지 않았다!
1398년 왕자의 난을 기획한 인물은 이방원이 아니다!
이성계는 이방원이 보낸 차사를 살해한 적이 없다!
그렇다면 이방원은 왜 이 모든 거짓을 말한 것일까?
피가 깊은 나무, 조선 느와르
이방원이 꿈꾼 잔혹하고 우아한 내일
500년을 감춘 용의 거짓말이 밝혀진다!
임진왜란을 재구성하는 대담한 시도를 통해 습관처럼 반복되는 역사의 비극을 지적하며 스테디셀러로 자리매김한 《비열한 역사와의 결별》의 저자 배상열의 신작, 《조선 건국 잔혹사》가 출간되었다. 이 책은 훗날 눈 밝은 이가 발견하기를 바라며 행간에 진실을 교묘하게 감춘 조선왕조실록을 토대로, 정몽주가 살해당한 그날의 미스터리에서 출발해 조선 건국기에 얽힌 거대한 거짓을 집요하게 추적한 결과다. 이 책에서 저자는 단언한다. 조선은 우리에게 알려진 것처럼 시작되지 않았으며, 우리가 아는 〈하여가〉와 〈단심가〉는 모두 거짓이었다고.
누가 정몽주를 죽였는가?
역사가 감춘 그날의 재구성
임금께서 눈물을 글썽거리며 저어했다. “그대의 빛이 파리하고 몸은 허약할진대 먼 길을 감당할 수 있겠소?” 이에 정안군이 아뢰었다. “종묘와 사직의 큰일을 하는 것인데 어찌 따르지 않겠습니까.”
임금이 중국 사행을 떠나는 여리고 무른 왕자를 아비로서 어쩔 수 없이 배웅하는 안타까운 풍경 같지만 여기서 정안군은 훗날 조선 태종이 되는 이방원이다. 우리에게 조선 태종은 형제들을 서슴없이 죽이고 아버지까지 유폐한 냉혹한 군주로 익숙하다. 그러나 역사상 첫 등장이라고 할 수 있는 《태조실록》의 기록에 나오는 그의 모습은 쿠데타로 왕실을 장악하고 형을 겁박해 왕위를 뺏은 야심가와는 사뭇 다르다. 실제로 이방원은 이성계의 아들 가운데 유일하게 문과에 급제했으며 칼보다는 붓과 친했던 서생이었다.
자연스럽게 함께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당대를 배경으로 하는 사극에서 빠짐없이 등장하는 정몽주와 이방원의 마지막 만남이다. 새로운 왕조의 실세와 멸망을 앞둔 왕조의 마지막 버팀재가 마주했던 당시, 나직한 목소리로 〈하여가〉를 읊으면서 회유하는 이방원에게 정몽주는 〈단심가〉로 단호하게 거절한다. 이에 이방원은 달빛을 받으며 돌아가는 정몽주에게 은밀히 자객을 보내고, 정몽주가 암살되었음을 알게 된 이성계가 분노하며 안타까움으로 크게 앓아눕는다.
우리에게 익숙한 이야기지만 실제 역사는 우리가 사극에서 봐왔던 장면과는 많이 다르다. 정몽주는 이슥한 한밤의 다리 위에서가 아니라 백주대낮에 보란 듯이 살해당했다. 또한 당시 정몽주는 고려를 대표하는 학자로 예순을 바라보던 나이였던 데 반해 이방원은 스물을 겨우 넘긴 책상물림에 지나지 않았다. 아무리 고려 최고 권력자의 아들이라고 해도 두 사람이 대결하듯 마주앉은 모습은 쉽게 납득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정몽주 암살을 지휘하기 위해서는 나라의 스승과 같은 이를 거리낌 없이 죽일 수 있는 칼잡이들을 다스리며 상황에 따라서는 직접 뛰어들 수 있는 완력과 경험을 갖춰야 하지만, 역사에 기록된 당시 이방원은 그러한 괄괄한 무인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아버지인 이성계를 따라 수없이 무공을 세웠던 그의 형들인 이방우나 이방과(훗날 정종)가 훨씬 그 자리에 그럴 듯해 보인다. 실제로 이방원은 실록의 내용대로라면 고려를 무너뜨리는 결정적인 공을 세웠음에도 개국공신 52인에서 철저하게 배제되었다. 이에 대해 허락 없이 정몽주를 제거해 이성계의 노여움을 샀기 때문이라고도 해석하지만, 당시 이방원의 명을 받아 이성계의 자택을 지켰을 뿐인 장사길까지 공신으로 녹권된 것과 견주면 정작 사건의 주역에 대한 대접은 터무니없을 정도로 박하다.
여기서 이런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정몽주와 독대한 끝에 암살한 이가 정말 젊은 이방원인 것일까? 만약 아니라면 왜 이방원은 그와 같은 거짓을 역사로 남겼던 것일까? 단순히 후대인들에게 위엄을 세우기 위해 기록을 조작한 것이었을까?
《조선 건국 잔혹사》는 이렇게 사소한 지점에서 비롯된 궁금증을 추적하다가 조선 건국 과정 자체에 대한 거대한 의문으로 나아가, 그때의 기록들이 숨긴 진실을 밝히고자 한 시도다. 이 책에서 저자는 방대한 당대 사료들을 대조해가며 사관들이 글줄이 아닌 글줄과 글줄 사이, 행간에 은밀하게 숨겨둔 사실들을 발굴해 한 가지 중요한 역사적 지점에 도달한다. 바로 1398년 1차 왕자의 난이다.
사실을 통해 진실을 뒤집은 도발적인 주장!
1차 왕자의 난, 또는 무인정사는 1398년 이방원을 중심으로 한 왕자들이 경복궁을 기습해 막냇동생인 이방석을 세자에서 폐하고 왕위를 찬탈한 쿠데타로 알려져 있다. 형제들끼리 죽고 죽인 극단적인 비극이 발생한 까닭으로는 흔히 권력에서 소외된 신의왕후 소생의 왕자들 및 종친들의 불만, 사병혁파 등의 조치에 불만을 품은 권신들과 개혁을 주도한 정도전 세력 간의 갈등 등을 꼽는다. 그러나 《조선 건국 잔혹사》에서는 역사상 후계자 문제로 패망한 사례들이 있음에도 이성계가 무리해서 막내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준 까닭에 대해 재검토를 요구한다. 한 왕조의 개조가 치맛바람에 홀려 자격이 없는 왕자를 감쌌기 때문에 모든 참사가 벌어졌다는 해석보다 조금 더 합리적인 배경이 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여기서 이 책의 저자는 1차 왕자의 난의 무대인 경복궁이라는 공간 자체에 주목한다.
경복궁이라는 이름을 지은 이는 이성계가 아닌 정도전이다. 《시경》에 나오는 ‘군자만년 개이경복君子萬年 介爾景福’에서 따온 것으로, 경복궁뿐만 아니라 근정전, 교태전, 강녕전 등 주요 왕궁의 이름 또한 모두 왕이 아닌 정도전이 붙였다. 알튀세르는 부르는 행위를 통해 불리는 자를 질서로 편입시키기에 이름 붙이기란 이데올로기 자체라고 했다. 성경에서 아담이 가장 먼저 시도한 노동 또한 만물에 이름을 붙이는 행위였다. 마찬가지로 궁궐 이름의 뜻과 작명 과정, 그리고 이름을 처음 부른 이의 정체를 살펴보면 조선의 정체성부터 나아가 훗날 예송논쟁까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정도전은 조선의 설계자로서 왕이 아닌 관료들이 다스리는 신권 중심의 국가를 구상했으며,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새 부대에 새 술을 따르는 이치처럼 고려와 인척관계로 얽히지도 않고 자신의 이념을 잘 따를 수 있는 어린 왕자가 보다 새로운 나라에 적합했다.
또한 막내가 후계자로 지목된 데에는 세대 및 문화 간의 충돌도 있었다. 유교를 근간으로 하는 조선에서 장자상속제는 당연한 원칙 같지만 고려에서 벼슬을 하며 유교식 질서를 배운 왕자들과는 다르게 이성계는 함흥을 거점으로 북방을 지배했던 울루스부카의 아들이자 조선을 침공했던 여진 군벌 삼선, 삼개 형제와는 고종사촌 간인 야인 출신이었다. 그리고 몽골을 비롯한 유목민족의 풍습으로는 가문의 적통을 잇는 이는 장자가 아닌 막내다. 이성계가 ‘오랑캐’라 불리는 옛 시절의 풍습을 새로운 왕조에 그대로 적용했을 리는 없지만, 장자가 아닌 이를 후계자로 지목하는 데 있어 심리적 저항감이 덜했을 것은 분명하다. 이성계 자신 또한 장자가 아님에도 가문을 이어받기도 했다.
문제는 신의왕후 소생의 왕자들을 비롯해 공신들의 불만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입장이 쿠데타의 원인일지라도 이유는 될 수 없다. 정도전을 위시해 조정을 장악한 개혁세력들이 이를 모를 리 없었기 때문이다. 상식적으로도 이성계와 정도전이 언제 폭발할지 모를 반대파의 동향을 면밀히 살피며 견제했을 것이 당연하며, 실제로 1차 왕자의 난 당시 명과의 갈등으로 벼슬에서 물러났음에도 정도전은 남은의 집에 묵으며 경복궁 주변을 지키고 있었다. 왕자들의 쿠데타는 필연이었으되 결코 성공할 수 없었으며, 실제로도 짧은 시간 신속하게 이뤄졌어야 함에도 사료들을 보면 저녁 7시경부터 새벽 2시경까지 장고하듯 긴 시간에 걸쳐 서서히 진행되었고, 그럼에도 기적처럼 성공했다.
이에 《조선 건국 잔혹사》는 다음과 같이 대담한 가설을 제안한다. 첫째, 1차 왕자의 난은 면밀한 계획에 의해 진행된 쿠데타가 결코 아니며 이성계의 급병이라는 돌발상황을 기회로 파악하고 즉흥적으로 이뤄진 반역이었다. 둘째, 1차 왕자의 난은 왕자들이 아닌 반 정도전 세력들 가운데 이성계와 매우 가까운 이들에 의해 벌어졌다. 셋째, 따라서 1차 왕자의 난은 이방원이 주도한 사건이 아니었으며, 그 반대로 이방원은 반역을 주도한 이들에게 일방적으로 선택을 받은 것이다. 그 까닭은 정도전이 이성계의 아들들 가운데 가장 어린 이방석을 추대한 사유와 유사하다. 이러한 가설을 바탕으로 저자는 반역의 주모자이자 사실상 태조 다음의 왕을 선택한 이로 역사에 가려진 의외의 인물을 지목한다. 이성계의 최측근으로 태조를 지근에서 모시며 그의 모든 것을 파악했으며, 딱히 두드러진 공이 없고 정치적 안배가 필요하지 않음에도 이숙번, 민무구 형제 등과 더불어 공신으로 책봉되었고, 이후 전개된 잔혹한 숙청과정에서도 살아남아 조용히 천수와 부귀를 누렸던 그림자와 같은 이. 바로 조영무다. 이 책에서는 그가 내부에서 이성계의 급병이라는 사태를 이용해 이성계를 배신하고 외부의 난을 촉발시킨 다음 대신 이방원을 선택해 왕을 만든 과정을 촘촘하게 밝힌다.
“용은 내게 비틀고 얽으라 했다”
이성계의 형 이원계는 고려와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이성계의 맏이인 이방우 또한 장자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권리를 모두 포기하고 사실상 은거한 채 삶을 마쳤다. 실록의 내용과는 다르게 호방한 무인이었던 이방과는 1차 왕자의 난 이후 왕위에 오른 다음 곧 내려왔다. 이후 넷째아들인 이방번은 이방과의 후계를 노리며 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가 배제당했다.
그렇게 왕위에 오른 이방원의 본색은 얼굴이 허연 책상물림이 아니라 독사의 두뇌와 범의 심장을 가진 냉혹하고 능숙한 정치가였다. 그는 이숙번을 비롯해 자신의 처가 친적인 민무구 형제들에 이르기까지 공신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하고, 사돈댁인 심온의 집안을 비롯한 모든 외척을 잔혹하게 견제했다. 의정부를 설치하되 권한을 축소하고 대신 육조직계제를 만들었으며, 지방행정조직을 정비하고 명과의 관계를 재설정하는가 하면 경원의 부활을 명해 훗날 북방육진 개척의 토대를 마련했다. 그 모두가 역설적이게도 정도전이 진행하고자 했던 새로운 세상을 위한 사업들이었다. 다만 이방원은 정도전의 설계를 부정하고 새로운 조선을 설계했다. 바로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하는 국가였다. 이방원은 죽을 때까지 정도전이 이름 붙였던 ‘경복궁’을 의도적으로 멀리했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이방원이 은밀하게 시행했던 또 다른 주요 사업은 바로 역사 조작이었다. “왕친록을 좌의정 박은, 이조판서 박신, 병조판서 이원 등에게 보이며 ‘이를 불살라 버림이 어떻겠느냐’고 이르자 모두가 아뢰었다. ‘대내에 들여다 두면 누가 알 수 있겠나이까!’” 《태종실록》에서 전하는 이른바 《왕친록》 스캔들이다. 이방원이 은밀히 전하며 절대로 남에게 들키지 말라고 단단히 일렀던 족보를 양녕대군은 보란 듯이 공개했다. 이 사건은 양녕대군 폐위의 한 원인으로도 지목될 만큼 파장이 컸다. 태종은 사관인 민인생과 논쟁을 자주 벌일 정도로 현재를 남기는 기록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했고, 과거를 기록한 역사들을 은닉했으며, 나아가 정몽주 살인사건부터 1차 왕자의 난까지 모든 피의 역사들을 자신의 행위로 돌렸다. 거짓을 통해 스스로의 체면을 세우기 위함이 아니라 이성계가 아닌 자신의 대에서 사실상 새로 시작하는 조선의 명분을 확립함으로써 국가의 틀을 다지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그는 동생들을 죽였고, 형을 무능한 이로 만들었으며 아비를 정신병자로 몰았고, 아들을 탕아로 매도했다. 모두가 조선의 미래를 위해서였다.
기꺼이 가해자가 된 이방원의 고백
태종太宗은 국가를 창건한 태조의 뒤를 이어 왕조의 틀을 가진 군주에게 내려지는 묘호다. 공교롭게도 조선 태종과 비슷한 시기 중국에서도 태종이 등장했다. 바로 명의 기틀을 다진 영락제다. 조선과 명의 태종은 모두 형제의 피를 뒤집어썼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이방원은 쿠데타로 즉위해 수많은 이들을 서슴없이 숙청했으며 자신의 형을 ‘정종’이 아닌 멸망한 고려의 말기 군주들에게서나 어울릴 법한 ‘공정왕’이라는 치욕적인 시호로 기록하는 등 잔혹과 냉혹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으면서도 태종이라는 묘호를 받았다. 그리고 그 묘호처럼 태종 이후 조선은 오백 년이라는 긴 시간을 버텼다.
《조선 건국 잔혹사》는 여진의 지배자 울루스부카의 손자가 한반도에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내렸던 비정한 선택들과, 속을 감추고 감내했던 긴 시간들과, 감당해야 했던 무거운 피의 무게와, 끝까지 감춰야 했던 역사적 진실들을 거슬러 올라간다. 이를 위해 정몽주가 살해당한 그날의 미스터리를 축으로 삼아 철저하게 폄훼된 고려 말의 사실상 마지막 군주인 공민왕부터 자신의 고향에서 아들에게 최후의 칼을 겨눈 이성계의 반란에 이르기까지 피를 지워지고 비틀린 조선 건국 과정을 새롭게 조망한다. 그렇게 오백 년의 미래를 위해 육백 년간 감춰왔던 한 남자의 거대하고 외로운 거짓말을 추적한 끝에 이 책이 도달한 지점은 아마도 다음과 같은 태종의 독백일 것이다.
“아드님, 자네는 성군이 되시게. 모든 피는 내가 마시고 갈 터이니.” 누구보다 비정했던 군주인 그의 아들 세종은 한국사상 손꼽히는 성군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