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들 때 펴보라던 편지
선승들이 삶으로 보인 지혜의 사리!
영혼을 깨우는 선승들의 일화 301
농사짓고 책 읽고 번역하는 농부 최성현이 20여 년 간 모은
선승들의 일화 모음
이 책은 선승들의 일화집이다. 일화란 삶이 남긴 이야기이다. 특히 선승의 일화는 생으로 보인 설법이다. 말이 아니다. 자신의 삶과 행동으로 보인 법어다. 행동으로, 나날의 삶으로 주위에 감동을 준 스님의 삶만이 일화로 남는다. 생애 자체가 아름다워야 일화를 남기고, 그 일화가 오래 전해질 수 있다. 아무리 지위가 높아도, 학식이 풍부해도 소용없다. 삶이 아름답지 않으면 그에게 일화는 없다.
강원도에서 자연농법으로 농사짓고 밤에는 책을 읽고 번역하는 농부 최성현. 작가는 지난 20년 간 기독교와 불교 등 다양한 종교서들을 읽었다. 종교서야말로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과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답을 찾도록 이끄는 가장 훌륭한 스승이다. 이웃과 나누고 싶은 좋은 구절과 이야기는 옮겨 적었다. 그렇게 모은 이야기 가운데 알곡만을 골라 이 책을 펴냈다. 20년이라는 오랜 시간의 독서와 생각이 쌓여 만들어진 결과물이다.
삶이 힘들고 길이 보이지 않을 때
선승들이 몸으로써 남긴 편지를 열어 보라!
이 책에 등장하는 선승들은 치열하게 수행한다. 그 수행의 모습은 다르다. 14년 간 하루도 거르지 않고 백 리를 걷고, 뱀 대가리를 씹어 먹고, 맨손으로 변소 청소를 하고, 버려진 시신을 거둬 주고, 얼굴을 불로 지지고, 도둑에게 다 내어주고, 여인의 방에서 밤을 새우고, 칼 든 무사와 맨손으로 맞장을 뜨고, 승려의 자리를 버리고 길거리에서 차를 팔고, 혹은 거지 무리에 섞여 살고, 가난한 일꾼으로 마을 사람들의 온갖 심부름을 다하고, 맨몸으로 호랑이에게 다가가고, 눈 먼 여인을 아내로 맞고, 모욕을 무릅쓰며 돈을 벌고, 스스로 불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상식에서 벗어난 행동과 언어를 통해 선승들이 세상에 전하고자 한 메시지는 무엇일까. 수행자는 깨닫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렸다. 안락함과 안위는 수행자의 것이 아니다. 생로병사 삶이 주는 고통에 어떻게 맞서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그 답을 찾기 위해 스스로를 던졌다. 선승의 기이한 행동은 여기서 비롯된다. 치열한 수행의 과정을 지나 선승들은 마침내 대자유, 대안심 속에 머물며, 더 큰 나를 위해 살게 된다. 나와 타인, 모두를 위한 대자비심이다.
살다 보면 누구나 반드시 이런저런 어려움에 맞닥뜨린다. 그 경계에서 두려움은 우리를 헤매게 한다. 진정한 용기란 그때 두려움 속으로 기꺼이 들어가는 것이다. 앞서 살았던 선승들이 남긴 일화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메시지는 바로 이것이다.
잇큐 스님은 제자들에게 편지 한 통을 내어주며 말했다.
“곤란한 일이 있을 때 이것을 열어봐라. 조금 어렵다고 열어봐서는 안 된다.
정말 힘들 때 그때 열어봐라.” (-본문 중에서)
삶이 힘들고 길이 보이지 않을 때, 이 책에 담긴 301가지 선승들의 일화가 ‘힘들 때 펴보라던’ 바로 그 편지가 될 것이다.
엄청난 정보의 홍수 속에서
작은 이야기가 주는 힘에 기대다
말이 홍수인 시대이다. 세상은 빨리 생각하고 빠르게 말하기를 권유한다. 지혜로운 말과 충고와 조언이 넘친다. 그러나 사실 우리 삶에 정말 필요한 말은 많지 않다. 단 몇 가지로 줄일 수 있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감동하고 무언가를 깨우치고 위로 받고 마음을 열게 되는 데는 아주 작은 이야기가 마음에 들어올 때이다. 그 작은 이야기에 귀 기울일 줄 안다면, 좋은 인생을 살아가는 든든한 도구를 장만하는 셈이 아닐는지.
저자 최성현 작가는 어릴 때부터 이야기, 일화 형태의 글을 좋아했다. 재미있고 이해하기가 쉬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책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모았다. 무위당 장일순 선생의 일화를 2년 동안 전국을 돌며 수집하여 『좁쌀 한 알』이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다. 또 일본어 번역가로 일본 책을 많이 읽고 번역하면서 좋은 일화를 많이 만났다. 자연스럽게 일본 승려의 일화를 중심으로 책을 엮은 계기가 되었다.
이 책에 담긴 301가지 이야기에는 농부인 작가가 하루 일을 마친 밤 혹은 새벽에 깨어 적어 내려간 감동이 그대로 녹아 있다. 나아가 ‘나는 무슨 이야기를 남기고 갈까’를 생각하며 내 삶을 돌이켜보게 된다.
어디선가 들어본 선승 이야기
그 기원을 찾다
“그대는 내가 강을 건너며 내려놓은 그 여성을 아직도 업고 있단 말인가!?”
승려의 신분으로 여인을 업어 강을 건네주었다고 탓하는 동료 스님에게 한 말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이야기이다. 이 말을 한 주인공은 누구일까. 바로 일본의 유명한 선승, 하라 탄잔이다. 또 단무지가 다쿠앙 스님의 이름에서 나왔다는 것쯤은 상식으로 통하지만 그에 얽힌 이야기와 뜻은 깊이 알지 못한다. 이 책에는 입으로 전해져온 선승들의 이야기가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그 기원을 찾고 의미를 되새길 수 있다.
귀뚜라미 소리를 듣고 깨달음을 얻은 ‘하쿠인’. 앞날을 걱정하는 제자들에게 편지를 남긴 ‘잇큐’. 오로지 앉아 있을 뿐인 지관타좌의 수행자 ‘사와키’. 사투리가 섞인 일상어로 선의 진수를 전한 ‘반케이’. 자신의 선을 자신의 대에서 단절시킨 단무지 선사 ‘다쿠앙’. 석 되의 쌀 한 다발의 땔감으로 청정함을 지진 ‘료칸’. 수행에 방해된다며 아름다운 얼굴을 불로 지진 ‘후안’. 4년 동안 날마다 백 리 길을 걸으며 수행한 ‘아시교도’…….
좋은 글, 좋은 선사들의 일화들은 볼 때마다 우리 마음의 결을 가지런히 쓸어준다.
“길을 잃는 순간 집중하라!”
선승이 남긴 한마디!
* 좋은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든 그들과의 만남은 모두 살아 있는 선문답이다.
* 먹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언젠가는 먹게 되어 있다.
* 하나에 돌을 지고 둘에 흙을 나른다.
* 내가 남에게 잘한 일은 모두 물에 흘려보내고, 남이 내게 잘 해준 일은 하나도 잊지 말고 돌에 새겨두라.
* 하루 계율을 지키면 하루 부처로 산 것이다.
* 질 수 있는 능력, 남이 옳고 내가 틀렸다고 인정할 수 있는 힘을 키워라.
* 재난을 만나야 할 때는 재난을 만나는 것이 좋고, 죽어야 할 때는 죽는 것이 좋다.
* 성공의 비결 세 가지. 첫째, 일찍 일어난다. 둘째, 몸과 마음을 씻는다. 셋째, 열심히 일
한다.
이 책의 구성
목차는 곽암 선사의 십우도를 응용해서 구성했다.
1장 ‘소는 어떻게 생겼나.’ 여기서 소는 세상의 본디 모습, 혹은 진리인데, 그걸 알아야 찾으러 나설 수 있기 때문에 제일 앞에 놓았다.
2장 ‘소를 찾는 길.’ 스님마다 다르다. 소는 아주 여러 형태로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하나의 길이 아니다. 소를 찾는 길은 여럿이다. 그 길들을 이 장에 모았다.
3장 ‘소를 찾은 사람들.’ 소를 찾은 스님들이 보인 행동을 소개했다. 소를 찾은 스님의 행동 또한 여러 가지다.
4장 ‘소를 타고 돌아오다.’ 소유에서 자유로워진 스님들의 일화만을 골라 채웠다. 가진 것을 다 내어주는 스님들의 삶은 아름답다.
5장 ‘소를 잊다.’ 자비를 실천하며 산 스님들의 여러 가지 이야기로 꾸몄다. 불교는 자비를 가르치는 종교다.
6장 ‘삶으로 말하다.’ 푹 익은 스님들의 여러 가지 삶의 모습을 담았다.
본문 중에서
“저 사람은 내가 못생겼다고 구박이 심했어요. 아예 사람 취급을 안 했지요. 만약 그때 저 사람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저는 그 시골에서 나올 수 없었을 겁니다. 거기서 생을 마쳤을 게 틀림없어요. 제가 오늘 이렇게 지낼 수 있는 것은 순전히 저 사람 덕분이에요. 그래서 그 은혜를 잊지 않으려고 초상화로 그려 걸어두고 보고 있습니다.”
내가 남에게 잘한 일은 모두 물에 흘려보내고, 남이 내게 잘해 준 일은 하나도 잊지 말고 돌에 새겨두라는 말이 있다. 복 짓는 길 중의 하나다. (34쪽)
쟈쿠시츠는 중국 유학을 다녀온 학식이 풍부한 승려인 한편 엄격하게 계율을 지키는 스님으로도 유명했다. 쟈쿠시츠는 이렇게 말했다. “계율을 지킨다는 것을 부처로 산다는 것이다. 하루 계율을 지켰다면 하루 부처로 산 것이다.” (40쪽)
“소심한 사람은 소심한 대로 좋다. 좌선을 한다고 소심한 사람이 배짱 있는 사람으로 바뀌지는 않는다. 소심한 건 나쁘고 배짱 있는 것은 좋다는 그대 생각이 문제일 뿐이다. 소심한 사람은 자상하다. 나쁘지 않다. 세상에는 여러 가지 사람이 있는 게 좋다. 모두 똑같다면, 예를 들어 모두 배짱이 있는 사람뿐이라면 그거야말로 큰일이다.” (47쪽)
“누가 저 굽은 소나무를 곧게 볼 수 있겠는가” 제자들은 서로 얼굴만 마주 볼 뿐 대답을 하지 못했다. 소나무는 구부러져 있다. 그런데 어떻게 곧게 본단 말인가. 그때 속가의 제자 중의 한 사람이 왔다. 방장스님은 같은 질문을 그에게도 했다. 그는 소나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대답했다. “네, 구불구불 구부러져 있군요.”
방장스님이 크게 웃었다. “바로 그거다. 굽어 있는 것을 굽어 있다고 하는 것이 곧게 보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곧게 보는 것이다 (56쪽)
“질 수 있는 능력, 다시 말해 남이 옳고 내가 틀렸다고 인정할 수 있는 힘, 이것은 정신적으로 어른이 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능력입니다. 나이가 들거나 계급이 올라가면, 혹은 세상에 이름이 조금 알려지게 되면 자기도 모르게 교만한 마음이 자랍니다. 주위가 늘 자기 비위를 맞춰주다 보면 거기에 물이 들며 저쪽을 생각하는 힘이, 상대편에게 양보하는 능력이 사라집니다. 상대방의 말이 옳은데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아니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받아들이는 능력을 어느새 잃어버립니다. (96쪽)
니시아리 보쿠산 선사는 아흔 살이 넘어서도 매우 건강했다. 어떤 사람이 선사에게 오래도록 건강을 유지하는 비결을 물었다. 선사는 잠시 생각하더니 자신에게 되묻듯이 말했다. “글쎄…… 매일 변소 청소를 해온 덕분일까.” 선사는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변소 청소를 매일 남모르게 해왔던 것이다. (114쪽)
우리는 경전이 귀한 줄 안다. 좌선만이 수행법인 줄 안다. 그 밖의 것들은 자잘한 것으로, 무시해도 좋은 것으로 알지만 아니다. 불법에서 벗어난 것은 하나도 없다. 수행이 아닌 일도 하나도 없다. 만물이, 만사가 법을 설하고 있고, 수행이 된다. 일러 사사천 물물천이다. 사사事事,곧 일마다 하늘의 일이요, 물물物物, 곧 만물이 하늘이다. 물속에 사는 물고기와 같다. 물이 곧 하늘이다. 물이 모든 것을 다 보여주고 있다. 단 한 순간도 감추는 일이 없다. (156쪽)
도쿠가와는 일본 최고의 권력자로 온 세상의 산해진미를 맛보아온 터라 오히려 소박하고 담백한 다쿠앙, 곧 단무지에서 새로운 맛을 느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도쿠가와는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무로 만든 것 같은데 어떻게 만들었습니까.” “소금을 넣은 쌀겨에 절였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맛이 있군요. 선사님, 이것을 누가 처음 만들어냈습니까”
다쿠앙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제가 했습니다. 보잘것없는 것에 칭찬이 과하십니다.” “아닙니다. 참으로 별미예요. 선사님께서 고안하신 거라면 앞으로 이것을 선사님의 이름을 따서 다쿠앙이라고 합시다. 어때요. 괜찮지 않습니까.” 이렇게 해서 단무지는 다쿠앙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196쪽)
오래 수행을 한 사람의 눈은 사람이나 일을 넓게 볼 수 있다. 창이 크다. 그 예를 들어보자. 여기 사진 한 장이 있다. 창가에 한 남자가 외롭게 서 있는 사진이다. 이 사진만으로는 혼자 사는 남자 정도로 보인다. 다음 사진은 좀 더 멀리서 찍었다. 그 사진은 그 남자가 교도소에 갇혀 있는 사람임을 알려준다. 자, 그러면 그보다 더 멀리서 찍은 사진은 어떨까? 그 사진은 그곳이 연극 무대임을 일러준다. (……) 창문을 키우면 보다 평화로운 길을 걸을 수 있는 거다. (251쪽)
뱀 대가리를 보고도 에키도 스님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태연히 그것을 받아 들고 도리어 물었다. “이거 우엉 대가리 아닙니까.” 이런 말과 함께 입안으로 툭 털어 넣고 우적우적 씹어 삼켜버렸다. 이 모습을 보고 후가이 선사는, “으음, 그런가!”라는 단 한마디 할 뿐 두 말을 할 수 없었다. 후학 에키도 스님의 탁월한 증거인멸의 행동 앞에서 대선지식인 후가이 선사도 어쩔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살다 보면 야채와 함께 살아 있는 뱀을 썰 수가 있다. 뱀의 머리를 우엉이라며 먹을 수 있다. (349쪽)
사이죠지 앞에 있는 너럭바위 위였다고 한다. 에 은 그 바위 위에 나무를 높이 쌓고, 그 위에 앉은 뒤 불을 질렀다. 잘 마른 나무는 금방 거센 불길로 타올랐다.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중에는 사이죠지의 방장스님인 료안도 있었다. 료안이 외쳐 물었다,
“에슌. 뜨거운가.” 선문답이었다. 동시에 마지막 질문이었다. 에슌은 결가부좌 자세를 조금도 흐트러트리지 않은 채 대답했다. 동요가 조금도 없는 목소리였다.
“차고 뜨거움은 선 수행자가 알 바 아닙니다.” (365쪽)
“어서 머리를 깎읍시다. 이리로 머리를 대세요.” 늙은 신하는 소리쳤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왜 내가 머리를 깎는단 말이요.”
그 말을 듣고 부난은 이발 도구를 내려놓았다.
“이제 아시겠습니까? 본인이 바라지 않으면 제가 깎고자 해도 깎을 수가 없습니다.” (373쪽)
지호 스님은 말한다. ‘먹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언젠가는 먹게 돼 있다.’고. 하쿠인 스님은 말한다. ‘걱정하지 마라. 생자필멸이 아닌가!’라고. 봄여름가을겨울도 그렇다. 절로 바뀐다. 내 힘으로 막을 수가 없다. 그것들은 좋아도 가고, 싫어도 온다. 그러므로 가면 미련 없이 보내고, 오면 반기는 게 좋다. 봄여름가을겨울만이 아니라 인생살이도 그렇다. 가는 것은 가고, 오는 것은 온다. 그러므로 가는 것은 가게 두는 게 좋다. 가는 것은 가게 두고 오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게 좋다. 오는 것이란 다른 것이 아니다. 지금 여기다. 우리는 누구나 지금 여기를 살 수밖에 없다. 달리 길이 없다. 우리는 지금 여기를 사랑해야 한다. 이와 비슷한 시가 있다. 여러 곳에서 만날 수 있는, 일본의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시다. 료칸 선사가 지은 시다.
재난을 만나야 할 때는
재난을 만나는 것이 좋고,
죽어야 할 때는
죽는 것이 좋다. (37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