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 삶
20세기에 가장 우뚝 선 지성, 한나 아렌트
평생을 바쳐 사유한 철학의 정수를 담은 가장 위대한 저서
《정신의 삶》은 오늘날 가장 위대한 지성인으로 평가받는 아렌트가 평생에 걸쳐 사유에 관해 탐구한 내용을 생의 말년에 집필한 책으로, 아렌트가 자신의 저작물 중 가장 중요하게 여긴 그의 마지막 저서다. 이 책은 ‘정신의 삶’을 구성하는 사유 자체를 탐구한다. 정신 외부 세계를 중점적으로 연구했던 이전의 저작들과 달리, 아렌트는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정신 활동을 사유, 의지, 판단이라는 세 가지의 정신 활동으로 분류해 조명한다.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방대한 철학적 자료를 아렌트만의 집요한 방식으로 분석하고, 인류가 어떻게 사유를 하며 삶을 살아왔는지 기술한다. 기존의 전통적인 철학적 관점을 전복시킨 이 책은 아렌트 사유의 정수가 담긴 책이자, 도전적인 분석서다. 하나의 통합본으로 출간된 이 최종 결실은 우리 세대와 미래 세대의 유산으로 평가될 수 있다.
보스턴 글로브(The Boston Globe)
아렌트가 집필한 저서 가운데 가장 많은 호기심을 자극하며, 가장 진지하게 생각을 가다듬게 하는 저작이다. 당혹스러울 만큼 강력한 이 책의 메시지는 아렌트가 아이히만의 재판 경험을 통해 어떻게 정신의 삶을 이끌어냈는지 아주 심도 있게 풀어낸다.
뉴욕타임스 북리뷰(The New York Times Book Review)
가장 탁월하고 독창적인 정치사상을 펼쳐낸 20세기의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
정신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그 근본을 담아낸 열정적이고 인간적인 지성, 《정신의 삶》
뉴스위크(Newsweek)
아렌트의 가장 철학적인 저서, 《정신의 삶》
사유하고, 의지하고, 판단하는 삶은
인간적인 삶을 위한 우리의 근본적 활동이다
- 아렌트 생전의 마지막 저서이자 가장 철학적인 책, 《정신의 삶》
《정신의 삶: 사유와 의지》(이하 《정신의 삶》)는 1977년과 1978년도에 각각 단행본으로 출간된 《사유》와 《의지》를 한 권으로 합본한 책이다. 책의 형태로 저술하지 못한 〈판단〉 부분은 아렌트가 생전에 쓴 강의록을 그대로 살려 부록으로 실었다. 아렌트 스스로 꼽은 가장 중요한 저서인 《정신의 삶》은 전통적인 정치철학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사상적 지평을 열었다는 점에서 주목해야 한다. 한마디로 아렌트의 정신의 삶 3부작은 ‘구체적 행위로서의 정치’와 ‘패러다임적 틀로서의 정치’ 사이의 연결성을 완성시킨 ‘독자적인 정신의 산물’이다. 이 책은 아렌트의 친구인, 에세이스트이자 비평가 메리 매카시가 편집했다. 푸른숲 출판사에서 이번에 새롭게 펴낸 《정신의 삶》은 《정신의 삶: 사유》(2004) 재번역본과 《정신의 삶: 의지》 초역본을 한 권으로 묶어, 한나 아렌트 연구의 국내 최고 권위자로 꼽히는 한국외국어대학교 홍원표 교수가 번역했다. 30년간 아렌트를 연구하고 아렌트 학회 회장을 역임한 그는 이 책이 지닌 학문적 공헌을 이렇게 말한다. “2,500년 전 이래 수많은 철학자들이 정신의 삶으로서 사유, 의지, 판단을 주로 개별적으로 조명해왔다면, 아렌트는 이들을 비판적으로 조명하고 종합한 ‘정신의 삶의 역사’를 우리에게 남겼다. (…) 우리는 매일 사유하고 의지하고 판단하며 삶을 영위한다. 이러한 활동은 우리 삶의 일부다.”(21, 24쪽)
- 정신의 삶은 나 자신의 삶을 이해하는 과정
아렌트는 자아 정체성 형성과 관련된 ‘사유’, 품성의 형성과 관련된 ‘의지’ 그리고 인간성 형성과 관련된 ‘판단’이라는 세 가지 정신 활동을 포괄하는 ‘정신의 삶’에 관한 내용을 초기 저서에서부터 제시한다. 전체주의에 대한 체험이 그 연구의 출발점인데 특히 1961년 나치 전범 아이히만의 재판을 취재하고 보도하는 과정에서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사유의 부재(무사유)’에 주목한다.“악이 마력을 지닌 무엇”이라는 오랜 사상적 전통을 의심하고(48쪽) “옳고 그름을 말하는 능력이 우리의 사유 능력과 연계될 수 있을까?” 그리고 “사유하는 그 자체는 악행을 자제하도록 하는 조건들에 포함될 수 있지 않을까? 아니면 악행에 맞서는 실제적 ‘조건’이 될 수 있지는 않을까?” 자문한다.(49쪽)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악의 평범성’을 고찰한 아렌트는 이전부터 자신을 “꾸준히 괴롭혀왔던” 내면의 의심, 즉 “사실적 경험에서 형성되는 동시에 시대의 지혜―철학의 한 분야인 ‘윤리학’이 ‘악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응하는 다양한 전통적 해답뿐 아니라 철학이 ‘사유란 무엇인가?’라는 훨씬 더 절박한 질문들에 대비해 제시한 훨씬 더 풍부한 해답―를 거스르는 도덕적 질문들”(49쪽)을 마주한 것이다.
- 아렌트의 가장 완숙한 정신세계를 보여준 정치철학의 진수
나치 전범인 아이히만의 재판 과정에 참관한 아렌트는 “아이히만에게서 나타나는 천박함에 충격을 받았다”고 이 책의 1권 〈사유〉 서론에서 밝힌다.(47쪽) 이것이 이 책의 집필 동기가 되어 평생의 숙제로 남게 된다. 아렌트는 ‘사유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해 ‘사유하지 않음’이 악의 원인이라고 결론 내린다. 아렌트는 어떤 전통이나 학파에 머물지 않고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면서 고대 그리스부터 당대까지의 철학 사상을 연구한다. 아렌트는 전통적인 철학에서 말한 사유와 의지와 판단을 해체하는데, 가령 사유를 직업적인 사상가들의 몫으로 둔 것이랄지, 사유의 최상의 형태인 관조를 활동의 우위에 놓는다는지, 의지를 욕구로 이해한다든지 하는 식의 형태를 촘촘하게 비판한다.
아렌트 스스로 꼽은 가장 중요한 저서이자 정치철학적 연구의 ‘최종 결실’인 이 책은 궁극적으로는 사유하고 의지하고 판단하는 정신 활동을 무시한 삶은 진정한 삶이 될 수 없음을 강조한다. 아렌트는 자신의 저서를 통해 일관되게 강조한다. “정신의 삶은 전문적인 철학자들을 포함해 정상적인 모든 사람의 일상적인 삶 속에서 이루어진다. 우리는 활동적 삶과 정신의 삶 속에서 동시에 살아가기 때문에, 정신의 삶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당연히 나 자신의 삶을 이해하는 과정의 일부인 셈이다.”(20쪽)
“인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가장 활동적이며, 혼자 있을 때 가장 덜 외롭다.”
_ 카토
■ 사유란 무엇인가 - 현상세계를 넘나드는 사유 활동
이 “질문은 ‘우리는 왜 사유하는가’라는 질문과 연결된다. 우리는 살고 있기 때문에 사유”하고 그것은 “진정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691쪽) 아렌트는 ‘사유’를 “나와 나 자신의 소리 없는 대화”(50쪽)라 정의히는데, 사유 · 의지 · 판단 활동이 지성이나 감정과 달리 현상세계로부터 잠정적으로 이탈할 때 비로소 시작하기 때문이다.(20, 111쪽) 즉, “사유하는 나는 실제로” “다른 사람에게 나타나지 않”지만 “무(無)는 아니”라는 것이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며 비가시적인 것에 열중하는 정신 활동은 말을 통해서만 자신을 드러낸다.”(168쪽)
이 책의 1권 〈사유〉는 크게 두 개의 축으로 구성된다. 하나는 ‘사유란 무엇인가?’를 밝히는 부분이고, 다른 하나는 형이상학 전통에 대한 비판이다. 형이상학 전통에 대한 아렌트의 입장을 이해하지 않고 첫 번째 축을 이해하기란 어렵다. “전통적인 철학에 따르면, 관조적 삶은 활동적 삶의 위에 있다고 전제한다. 그러나 아렌트는 이러한 개념적 틀을 거부하고 활동적 삶과 정신의 삶 사이의 관계를 수평 관계로 구성했다. 활동적 삶과 정신의 삶은 긴장 관계를 유지하지만 대칭 관계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해, 결정, 선택으로 이루어지는 행위 과정이 사유, 의지, 판단을 필요로 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우리는 인간다운 삶을 구성하는 데 두 가지 형태의 삶이 상호밀접하게 연계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20쪽)
활동한다는 것은 산다는 것이다. 즉 활동이 곧 삶이다. 가시적 형태의 활동인 노동?작업?행위가 구체적 삶을 구성하며 신체의 눈에 드러나지만, 사유 활동 역시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중요한 일부면서도 정신의 눈에만 드러난다. 현상세계의 관점에서 볼 때, “사유하는 내가 머무는 모든 곳 ─ 사유가 빛의 속도보다 더 빠르게 넘나드는, 시간이나 공간적 거리에도 불구하고 자유자재로 현재화할 수 있으므로 ─ 은 어디에도 있을 것 같지 않은 곳이다.”(308쪽) “만약 우리의 공간적 실존에 의해” 우리가 있는 곳이 결정된다면, ‘우리가 사유할 때,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발레리의 표현은 옳을 것이다.(309쪽) 이렇듯 비가시적 영역에서 진행되는 소리 없는 대화는 언어라는 도구 덕택에 현상으로 드러날 수 있다.
정치행위가 말을 매개로 하여 이루어지듯이, 사유 활동 역시 언어를 매개로 진행된다. 앞서 말했듯이 “언어는 정신활동을 외부세계뿐만 아니라 사유하는 나 자신에 드러낼 수 있는 유일한 매개체다.”(674쪽) 언어가 소통수단으로서 필요하지만, 사유는 나와 나 자신이 말을 주고받더라도 청중을 대상으로 하지 않기에 소통을 전제하지 않는다. 현상세계에서 나와 친구의 관계, 그리고 사유할 때 나와 나 자신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차이점과 공통점을 고려해보자. 나는 현상세계에서 친구와 우정을 나누려면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 하기 때문에 원만한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 그러나 사유는 가까운 친구와 헤어져 ‘혼자’ 활동하기 때문에 고독 상태에 놓이게 된다. 이러한 유형의 고독은 고립은 아니다. 하나 속의 둘의 이원성은 “대화를 수행하는 두 사람이 훌륭한 형태를 유지해야 한다는, 즉 상대자를 친구로 삼아야 한다는 것을”을 의미한다.(674쪽) 우리는 또한 이 과정에서 “질문하는 사람이며 답변하는 사람”이다.(674쪽)
■ 의지란 무엇인가 - 의지의 집중과 외부세계의 내재화
의지란 정신의 내면성과 외부세계를 통합하는 능력으로 정신 활동에 머물지 않고 행위를 촉진하는 근원을 말한다. 이러한 의지는 감각의 관심을 인도하고 기억에 각인된 상을 주관하며 이해를 위한 자료를 지성에 제공함으로써 행위가 발생하는 근거를 제공한다. 기존의 철학자들은 의지를 단순한 환상이나 의식의 환영, 의식의 구조 자체에 내재된 일종의 기망으로 이해했다. 그래서 의지 능력을 인위적 문제를 해결하고자 창안한 인위적 개념으로 착각하기도 했다. 또한 “욕구로 이해된 의지는 욕구 대상이 소유될 때 중단”되기 때문에,“의지와 욕구의 차이를 강조”한다.
(486쪽)
아렌트는 의지 능력을 다음 두 가지로 정리한다. 하나는 대상들이나 목표들 가운데 선택하는 능력, 즉 목적에 도달하는 수단을 자유롭게 심의하는 능력이며, 다른 하나는 ‘시간 속에서 일련의 계기적인 것을 자발적으로 시작하는 능력’ 또는 ‘인간 자신이 새로운 시작이기에 갖게 된 인간의 시작 능력이다.(500쪽)
아렌트는 의지가 순수한 정신 활동뿐만 아니라 감각지각에서 나타내는 힘(결합력)이라는 것을 지적한다. 이는 정신, 특히 ‘의지의 집중’에서 비롯된다. “의지는 집중 덕택에 첫째로 우리 감각기관을 의미 있는 방식으로 현실세계와 결합시키고, 이어서 이 외부세계를 사실상 우리 자신으로 끌어들인다.”(678쪽)
“의지는 근본적으로 긍정 형태의 의지하기(willing)와 반대 또는 부정 형태의 의지하기(nilling)로 구성된다. 가령, 이 순간 ‘나는 글을 쓸 것인가’ 아니면 ‘쓰지 않을 것인가’라는 표현에서 전자는 ‘willing’, 후자는 ‘nilling’이다. 일상적인 용어로 표현하자면, ‘의지하다(뜻하다, 의도하다, 원하다, 의욕하다)’와 ‘싫어하다(반대로 의지하다)’로 대비된다. 이러한 대비는 바로 의지의 이중성을 기본적으로 나타낸다. 아렌트는 두 가지 요소를 포괄하는 추상적 형태의 ‘의지’를 주로 대문자 ‘Will’로 표현하며, 개별적 형태의 의지를 소문자 ‘will,’ ‘willing’, ‘counter-willing’으로 표기한다.”(677쪽)
“의지는 사유와 마찬가지로 현상세계 속에서 진행되지만 현상세계로부터 이탈한 상태에서 수행되는 정신 활동이다. 차이점이 있다면, 의지는 현상세계와 사유보다 더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사유보다 더 많은 자율성을 유지할 수 있다. 즉 의지는 일반성을 지향하는 사유와 달리 특수성을 지향하므로 현상세계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따라서 현상세계와 의지 사이의 공간적 거리는 사유의 경우보다 가깝다고 할 수 있다.”(677~678쪽)
■ 판단이란 무엇인가 - 현상세계에 대한 ‘비관여적’ 관심
아렌트에 따르면, “판단은 정신의 산물인 일반성과 감각기관에 있는 특수성을 결합시키는 신비스러운 기본 재산”이다.(681쪽) “사유는 일반화를 의미하지만, 판단은 특수성과 일반성을 결합시키는 능력”이 된다.(681쪽) “판단은 시각?청각?촉각과 달리 가장 사적인 감각, 즉 취미와 연관되며 오감을 종합하는 육감”이라고 할 수 있다.(681쪽)
사건의 종결 이후에 비로소 형성되는 판단은 다른 정신활동들과 마찬가지로 현상세계로부터의 이탈과 거리감을 필요로 한다. “판단은 현상세계를 버리지 않고 현상세계에 대한 적극적 관여 상태에서 전체를 관조하기 때문에 특권적 위치로 물러선다.”(680쪽) 따라서 판단과 현상세계 사이의 거리감은 사유의 경우와 정도의 차이가 있다. 이러한 형태의 이탈을 이해하기 위해 행위자와 구경꾼(관찰자)이 서 있는 위치와 정신 상태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
행위자는 전체의 일부로서 자신의 역할을 하며 현상세계의 일부를 구성한다. 철학자는 사유활동을 할 때 현상세계로부터 이탈하지만, 구경꾼은 현상세계에 있으면서 그곳에 함몰되지 않은 채 그것과 일정한 거리를 둔 채 전체를 관찰한다.“관찰자의 관점은 그가 사태를 전체로서 본다는 것이다.”(680쪽) 운동경기에서 경기장에서 뛰는 선수는 자신의 일에만 몰두하지만 관찰자는 관람석에 앉아 거리를 유지한 채 경기 전체를 조망하는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이는 역사적 사건의 참여자와 역사가의 관계에도 적용된다.“역사가는 과거에 대해 판단하는 탐구자”다.(680쪽) 달리 표현하면, 판단하는 나는 피타고라스의 구경꾼과 같다. 구경꾼은 행위자들의 활동을 관찰하면서 “초연한 기쁨”을 누릴 수 있기 때문에 고독하지 않다.(680쪽) 물론 이를 가능케 하는 정신작용은 상상력과 반성이다.
■ 《정신의 삶》은 정치 행위의 정점을 보여주는 책
현대 철학에는 아렌트 이전과 이후가 있다고 말할 정도로, 아렌트에 대한 관심은 단순한 지적 호기심의 차원을 넘어서고 있다. 아렌트를 읽는 독자는 그가 활동했던 시대보다 점점 더 증가하는 추세다. 아렌트의 사상은 학문적 입장과 학제 영역에 관계없이 주목을 받는다. 이것은 부분적으로 아렌트가 통상적인 의미의 좌우라는 범주화를 거부한다는 사실과도 밀접하게 연결된다.
《정신의 삶》은 각기 ‘사유하기, 의지하기, 판단하기’라는 비가시적인 활동이 인간이 살아가는 한 앞으로도 중요한 문제이며, 현재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어떻게 연결시켜 현실에서 적용시킬지를 고민하게끔 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유하기, 의지하기, 판단하기가 여전히 유효한 이유는 결국 이 세계 속에서 이 세계를 구성하는 일원으로 살아가는 내가 이러한 정신의 삶을 행하지 않고는 결코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며 살아가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아렌트가 말한 정치란 거창한 것이 아니다. 일상에서의 정치는 내가 속한 공간과 관계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정치적 삶과 정신의 삶은 인간다운 삶으로 연결된다. 공공영역이 그 정체성을 상실할 때, 정치적 삶은 위축될 수밖에 없다. 이때 시민들의 정치행위, 그리고 현실을 비판하는 능력을 발휘하면 새로운 시작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 대표적인 예로 2016년 말부터 2017년 초까지 우리나라의 시민들이 보여준 촛불집회를 들 수 있다. 당시 외신에서도 주목할 만큼 이 사건은 세계적으로 일상의 정치를 보여준 가장 민주적인 사건 중 하나다. 아렌트가 주장한 정신의 삶이 극적으로 실현된 이 사건은, 결국 사유, 의지, 판단이 하나의 행위로 이어져 있음을 보여주며 정신의 삶과 활동적 삶이 서로 밀접하게 상호작용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