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시집
생생하게 찢고 들어오는 구체 너머 즉물(卽物)의 언어
시인 김정환이 선별해서 엮고 옮긴 독일 시편
괴테, 릴케, 트라클, 횔덜린, 게오르게, 호프만슈탈, 모르겐슈테른, 니체……
48명의 시인, 320편의 생생한 시
시인이자 소설가이며 번역가로 다채롭게 활동하며 지금까지 100여 권이 넘는 저서를 펴낸 전방위 작가, 김정환 시인의 독일 시 번역서가 자음과모음에서 출간되었다. 괴테, 릴케, 트라클, 횔덜린, 게오르게, 호프만슈탈, 모르겐슈테른, 니체 등 독일어권 시인 총 48명의 다양하고 생생한 320편의 시들이 수록되어 있다. 시인 김정환은 이 시편들을 직접 선별하고 엮고 꿰어내며 “생생하게 찢고 들어오는 구체 너머 즉물(卽物)의 언어”로 번역해냈다. 이런 분량과 이런 구성의 독일 시집은 전 세계에서 아마 유일할 것이다.
“횔덜린 「빵과 포도주」를 자세히 읽으며 그의 낭만적 서정의 복잡한 깊이가 광기를 넘나드는 바로 그만큼 현대를 선점한다고 생각한 것은 30여 년 전이고, 어렴풋한 느낌으로 독일 종교시가 중세에 이미 놀라운 깊이에 달했고 그 서정적 절정이 초월자를 부르는 릴케의 절규인 것을 확인한 것은 20여 년 전 일이다. 어렴풋한 느낌으로 괴테 문학의 요체가 그 요란한 「파우스트」 등 드라마라기보다는 귀족적인 농민 서정의 응축으로서 민요시이고, 실러는 ‘환희의 송가’류 시보다 시민 정신이 시민 미학을 구축해가는 문장의 광경으로서 드라마라는 생각이 든 것은 10여 년 전이었다”라고 시인 김정환이 옮긴이의 말에서 밝혔듯, 이 『독일시집』은 그가 애독한 독일어권 시편들에 대한 30년 동안의 깊이와 넓이에 해당한다.
빵과 포도주
-횔덜린
I
빙 둘러 쉬고 있다 도시가; 고요해진다 불 켜진 거리가,
그리고, 횃불 치레로, 서둘러 움직인다 마차들 저쪽으로,
배가 불러 귀가한다 낮의 기쁨에서 쉬기 위하여 사람들,
그리고 이윤과 손실 달아본다 곰곰 생각 머리 하나
아주 흡족히 집에서; 다 팔렸다 포도와 꽃들
그리고 손의 작업으로부터 쉬고 있다 바쁜 시장이.
하지만 현악 울린다 멀리 정원에서; 아마,
거기서 어떤 연인이 연주하거나 어떤 외로운 사내가
멀리 있는 친구를 생각하겠지 젊은 시절도; 그리고 샘,
늘 솟아나고 시원한 그것이 솨솨 흐른다 향내 나는 화단을.
고요히 황혼 공기로 울린다 종소리,
그리고 몇 시인가 싶어 하나둘 부르며 센다 그 수(數)를.
이제 또한 바람 불어 자극한다 숲 꼭대기를,
보라! 그리고 그림자, 우리 대지의, 달의 그것,
온다 은밀히 지금 또한; 그 도취한 것, 밤이 온다,
별로 가득 차 그리고 정말 그다지 우리를 신경 쓰지 않고,
빛난다 그 놀라게 하는 것이 거기, 인간 사이 낯선 그것이
산맥 정상 상공으로 슬프고 화려하게.
(……)
_160~161쪽
괴테, 릴케, 트라클, 횔덜린, 게오르게, 호프만슈탈, 모르겐슈테른, 니체……
48명의 시인, 320편의 생생한 시
『독일시집』에는 기존의 선집에서 흔히 빠지는 주요 장시들을 거의 모두 수록했고 주요 시인들마다 소(小)시집 이상의 지면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시편들의 구성은 시인 김정환 특유의 논리와 감각을 통해 재구축되었다. 이를테면 ‘두이노’는 흩어놓았고 ‘오르페우스’는 모아놓았다. “너무 일찍 횡사한 재능은 죽음이 끔찍해서 유작들을 흩어놓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괴테, 릴케, 트라클, 횔덜린, 게오르게, 호프만슈탈, 모르겐슈테른, 니체, 슈타들러, 베르펠, 바인헤버, 하임, 데멜, 노발리스, 보르헤르트, 하이네, 실러, 슈토름, 플라텐, 포겔바이데, 클라우디우스, 뫼리케, 그리피우스, 실레시우스, 클롭슈토크, 헤벨, 브렌타노, 울란트, 아이헨도르프, 슈트람, 드로스테-휠스호프, 오피츠, 횔티, 그로트, 켈러, 마이어, 레나우, 뢰르케, 리스트, 플레밍, 베케를린, 뮐러, 렌츠, 티트게, 뤼케르트, 주칼마글리오, 홀츠. 『독일시집』에 들어가 있는 시인들의 명단이다. 독일어권 시를 대표하는 다채롭고 생생한 얼굴들이다. 독자들은 이 한 권의 책으로 내로라하는 독일 시인들의 가장 현대적인 고전을 음미하며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겨울 저녁
트라클
눈이 창가에 내릴 때,
오래 저녁 종 울린다,
많은 이에게 식탁이 차려졌고
집에 가구가 완비된 상태다.
많은 이들이 여로에
온다 문에 어두운 오솔길 따라.
황금빛 꽃 피운다 은총의 나무가
대지의 시원한 수액에서.
나그네 들어간다 고요히;
고통이 석화(石化)했구나 문지방을.
거기 반짝인다 순수한 밝음으로
식탁 위에 빵과 포도주가.
_1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