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에서 ‘배수아’라는 이름은 낯설고 이국적인, 매혹과 비밀스러움이 그득한 영토의 푯말로 쓰인다. 신작 『작별들 순간들』은 읽기와 쓰기, 작가로 존재하기에 대해 쓴 산문으로 그 영토를 여행하는 데 가장 적합한 안내서가 될 것이다. 작가의 문장을 따라 조금씩 그 땅을 디디다보면 어느 순간 빽빽한 투야나무 울타리로 둘러싸인 오두막을 만나게 될 것이다. 외부와 단절된 그곳에는 정원의 삶과 읽고 쓰는 삶만이 있다. 목가적인 것과는 다르다. ‘벗어난 것’에 가깝다. 익숙한 고통과 근심에서, 언어에서, 나 자신에서 벗어났을 때 새로이 느낄 수 있는 순간들, 그것이 만들어내는 환상적인 화음들.
배수아 작가는 베를린 인근 한 시골 마을의 정원 딸린 오두막을 15년 가까이 오갔다. 처음에는 시차를 두고, 그러나 점점 더 오래 그곳에 머물게 되었고 마침내 살게 되었다. 자신에게 중요해지리라 짐작하지 못한 채 중요해지는 장소가 있다. 특히 배수아 작가는 한국에 체류할 때는 번역을, 독일 오두막에 머물 때는 본인의 작품을 쓰는 식으로 작업해왔기 때문에 이곳은 더욱 특별해진다. 작가는 자신이 ‘정원에 속한 사람’이 되어갔으며 그것은 자신의 글쓰기의 성분과 정신, 철학을 모두 포함한 글쓰기의 양태가 오두막으로 옮겨졌다는 것을 뜻한다고 전했다. 더불어 이 산문집은 특정 ‘장소’에 관한 글이라기보다 ‘내가 어떤 장소에 있었음으로 인해 쓸 수밖에 없는 글’이라고도.
소설가의 산문을 엮어 책으로 내는 방식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여러 매체에 실은 시의적 산문들을 정리한 책과,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콘셉트 아래 써내려간 산문집. 이 책은 후자에 속한다. 읽기와 쓰기, 작가로서 존재하기에 대한 배수아 작가 특유의 세계가 베를린과 인근 시골마을의 오두막 정원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긴 호흡의 산문으로, 2022년 5월부터 10월까지 문학동네 웹진 『주간 문학동네』에 밀도 높게 연재된 원고를 바탕으로 한다. 연재 당시 제목은 ‘순간들 기록 없이’였다.
우리가 평화롭게 정원의 흙 위로 몸을 기울인 동안, 당신의 몸 위로 빛과 그늘이 어지럽게 얼룩지는 그 순간에도. 작별은 바로 지금, 우리의 내부?숲안쪽?에서 일어나고 있는 가장 궁극의 사건이었다. 배추흰나비의 애벌레가 몸을 구부리면서 당신의 목덜미 위를 느리게 기어간다. 나는 손가락 끝으로 그것을 집어올린다. 평화와 고요. 오직 빛과 호흡만이 있는 순간. 지금 당신이 불타고 있다는 증거인가? 글쓰기는 작별이 저절로 발화되는 현장이다.(83쪽)
가을에서 겨울이 지나갈 때까지 나는 두 권의 책을 번역하기로 되어 있었다. (“모든 언어는 외국이다.”) 글쓰기는 언어를 만들어가는 일이었다. (“나는 무성영화와 같은 글을 쓰고 싶어.”) 나는 스스로 만든 언어 안에 거주하기를 원했다. 존재는 거주이다. 내 거주는 글쓰기 안에 있었다. (“내 언어는 무너지는 집이다.”) 어린 시절 이후 나는 어디에서 살아왔던가? 항상 나는 내 최초의 집을 생각한다. 내게 최초로 말과 글을 가르쳐준 이는 누구였을까? 글을 쓸 때, 나는 종종 눈앞에서 허물어지는 화가의 아틀리에를 상상한다. (232~233쪽)
저자소개
소설가이자 번역가. 1965년 서울에서 태어나서 이화여대 화학과를 졸업했다. 1990년대에 등장한 젊은 작가 가운데에서도 그녀는 독특하다. 이화여대 화학과에 입학한 배수아는 국어 과목을 아주 싫어했다. 그러던 어느 날 20대 후반으로 접어들었다는 자의식으로 인해 소설을 쓰게 됐다. 1993년 서점에서 단지 표지가 이쁘다는 이유로 우연히 집어든 문학잡지 [소설과 사상]에 「천구백팔십팔년의 어두운 방」이 당선되면서 등단했다.
취미로 글을 쓴다고 말하는 그녀에게서 문학적 엄숙주의는 찾아볼 수 없다. 그래서 그의 문장은 당혹스럽고 생경하며 파격적이다. 배수아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불온하고 불순한 이미지에 둘러싸여 있다. 한결같이 사회로부터 소외당한 늦된 아이들이며 주로 스무살 안팎의 주변적 존재이다. 이들은 사회규범에 적응하지 못하고 진화를 거부하는 인물이며 '스스로 선택한' 이상한 인물이다. 이러한 인물들의 신세대적 일상을 파고들며 신세대적 일상에 숨어 있는 존재의 어둠과 불안, 삶의 이중적 풍경에 대한 감각적 묘사로 일관하다. 체험과 사실성이 강조되던 우리 문학사에서 배수아는 은폐된 존재의 어둠을 탐사하며 독특한 개성을 갖춘 신세대 작가로 성장해왔고, 이제는 미적 성숙의 단계를 완성해가고 있다
『나는 이제 니가 지겨워』는 이지적이면서 자기 주장이 강한 문체를 통해 남녀관계의 속물성을 파헤치고, 독신녀의 시선을 통해 보여지는 경제ㆍ섹스ㆍ결혼관ㆍ자기세계에 대한 솔직하고 쿨한 느낌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그 사람의 첫사랑』에서 주인공들은 모두 사회로부터 버림받거나 스스로 추락중이다. 그들의 배후에는 일탈과 파격, 섬뜩한 비애가 차갑게 펼쳐져 있다. 세기말의 쓸쓸함과 밀봉된 희망, 피학적인 아픔이 한꺼번에 만져지는 작품이다.
『붉은 손 클럽』은 외형의 독특함을 넘어, 단자화된 관계에 상처받으면서도 결국 또 다시 사랑을 선택하는 인간의 심리, 사랑의 대상을 향한 비이성적 감성들, 일상에 물든 관계의 지리멸렬함을 포착해 내는 배수아의 섬세한 감성과 날카로운 시선을 느낄 수 있다. 특히 배수아의 감각적이고, 이미지적인 글쓰기가 잘 나타나 있다. 『심야통신』은 저마다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그녀 특유의 감각 더듬이로 포착하고 있는 창작집이다. 배수아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고 아무것에도 감동하지 않는 일상인의 내부에 꿈틀거리는 목마름과 허기를 이야기한다. 그녀는 후기 산업사회의 일련의 징후를 상징하고 허무주의적 인간형과 이미지와 기호로 점철된 우리 세대의 문제적인 서사 형식을 보여주면서 자기만의 자리, 자기만의 소설을 탄생시켰다.
『철수』는 인간 존재 안의 어둠과 생의 운명적인 폭력 속으로 더 한층 깊이 탐사해 들어가는 배수아 소설의 불온한 매력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섬뜩한 생의 이면을 보아버린 자의 어둡고 서늘한 내면 풍경을 그려내고 있다. 『이바나』는, 소설 속의 '나'가 외국 여행 중에 산 중고 자동차의 이름이다. 또, '그녀'로 불리는 이바나는 여행기를 편집하는 편집자에겐 신비의 여성이다. '이바나'는 어느 도시의 이름이기도 하고, 어느 지방에선 흔한 이름이기도 하다. 자신의 단편집 말미에, 배수아는 '나에게 제목이란 면상의 흉터와도 같아서 도저히 어찌할 수 없이 치명적이다. ...... 지금 나는 왜 모든 소설은 예외 없이 제목을 필요로 하는가 회의스럽다.' 고 말했다. 가장 짧은 제목이 가장 좋은 제목이라고도 했는데, 이 소설의 제목 '이바나'는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엇인지조차 알 수 없는 이 '이바나'는 내내 소설 속 화제의 중심인데 비해, 등장인물들의 이름은 모두 뭉개져 있다. 나, K, B, 산나, Y...... '죽기 전까지는 대도시를 빠져나갈 수 없는 사람들', 그들이 견디는 불면의 밤을 섬뜩하게 그리고 있다.
이 외에도 『어느 하루가 다르다면, 그것은 왜일까』, 『뱀과 물』, 『밀레나, 밀레나, 황홀한』, 『멀리 있다 우루는 늦을 것이다』, 『동물원 킨트』, 『이바나』, 『일요일 스키야키 식당』, 『당나귀들』, 『독학자』, 『훌』, 『에세이스트의 책상』, 『북쪽 거실』, 『올빼미의 없음』, 『서울의 낮은 언덕들』, 『알려지지 않은 밤과 하루』 등을 썼다. 산문집 『처음 보는 유목민 여인』, 창작집 『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 『그 사람의 첫사랑』 등과 장편소설 『랩소디 인 블루』, 『부주의한 사랑』, 『붉은손 클럽』 등이 있다. 또한 몸을 주제로 한 에세이 『내 안에 남자가 숨어 있다』를 펴냈다.
역서로는 페르난두 페소아의 『불안의 서』, 프란츠 카프카의 『꿈』, 로베르트 발저의 『산책자』, W. G. 제발트의 『현기증. 감정들』, 『자연을 따라. 기초시』, 헤르만 헤세의 『나르치스의 골드문트』, 『데미안』 등으로 2003년 한국일보문학상, 2004년 동서문학상을 수상했다. 사데크 헤다야트의 『눈먼 부엉이』, 페르난두 페소아의 『불안의 서』, 프란츠 카프카의 『꿈』, 로베르트 발저의 『산책자』,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달걀과 닭』과 『G. H. 에 따른 수난』 등이 있다.
전통 소설의 인물과 이야기 중심에서 벗어나 어떻게 서술 자체가 이야기를 만들어가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인 「무종」을 통해 2010년 제34회 이상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하였으며, ‘월요일 독서클럽’ 회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독특한 문체와 색깔로 열혈 독자군을 거느려 왔던 그녀는 이제 사유하는 문장의 힘으로 새로운 독자들과도 만나고 있다.
목차
프롤로그 연인 일곱번째 아이 낙엽을 헤치며 걷는 사람 WG, 그리고 개구리를 먹는 자 작별들 누가 우리에게 자연을 암시하는가 최초에 새를 가리킨 여인 내가 가진 넝마를 팔고 영혼의 서쪽 벽 9월의 황무지에서 고통 고요. 회색. 멀리 헝가리 화가의 그림 에필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