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세, 반항을 노래하다
헤세는 힐링의 묘수를 전파했던 천재 소설가가 아니다.
개인을 억압하고 개성을 말살하는 체제악에 맞섰던 반항아였다!
『수레바퀴 아래서』, 『데미안』, 『유리알 유희』의 작가, 우리가 사랑한 헤르만 헤세의 삶과 문학을 새롭게 읽는다!
헤르만 헤세만큼 전 국민적인 명성을 쌓고 두터운 팬층을 확보한 서양 작가는 드물 것이다. 『수레바퀴 아래서』와 『데미안』은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과 함께 사춘기 무렵 통과의례처럼 접하는 필독서가 된 지 오래고, 소박한 농부의 모습으로 포도밭을 일구는 헤세의 모습은 『정원일의 즐거움』과 같은 저작을 통해 우리에게 자연주의 작가로 각인되었다. 특히 청춘들은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는 명문과 함께 헤세를 내면의 성장에 천착한 작가로 간주하여 『데미안』에 열광했는데, 이는 괴테가 말한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게 마련이다”와 함께 세기를 넘어 젊은 영혼들에게 각성과 도전, 열정을 불러일으킨 유의미한 자극제가 되어주었다. 또한 우리나라의 헤세는 언제부터인가 ‘힐링의 작가’로서도 입지를 굳혔다. 출판 관계자들은 물론 독자들마저 “그의 책을 읽으면 아픔, 슬픔, 고통이 사라진다”라고 홍보하거나 “헤세의 글은 심리치료에 탁월한 효용성을 발휘한다”고 말해온 탓이다. 그러나 이는 헤세가 강조한 ‘자아 찾기’를 오독한 결과다. 헤세가 말하는 자아 찾기란 대중이라는 기계의 일부로 타락하지 말고 그 기계의 현실에 저항하라는 것이다. 사실 세상의 어떤 작가도 개인의 내면에만 집착하지 않는 법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나온 헤세 관련 책들은 하나같이 그렇게 말한다. 헤세는 사회와 개인의 관계를 다룬, 특히 사회라는 체제가 개인을 억압한 우리 상황을 가장 절실하게 보여준 작가로서 개인의 자살과 같은 비극을 내면 심리의 갈등이 아니라 사회의 부조리 때문에 생겨난 비극으로 보았다. 그런 비극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인간 자신만이 아니라 사회를 혁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나라에는 헤세의 작품이 수없이 번역 출판되었고, 그의 삶이나 작품에 대한 해설서도 매우 많이 소개되었다. 그러나 한국인이 쓴 헤세 평전이나 체계적인 연구서는 없다. 이 책은 그러한 지적 공백을 메우고자 쓰는 한국인 최초의 헤세 평전이자 전(全) 작품 읽기의 시도로서 우리가 사랑해온 만큼 오독 또한 횡행했던 헤세와 그의 소설이 간직한 진면목을 탐색하는 신선한 작업이 될 것이다.
청춘이 사랑하는 헤세, 대한민국이 사랑하는 헤세
헤세는 인기 작가다. 불안하고 고독한 청춘을 노래한 작가, 내면세계에 천착한 작가, 자아 찾기로 대표되는 치열한 내적 투쟁을 전개한 작가, 동양적인 신비를 노래한 작가, 정원을 일구며 소박한 자연으로 회귀한 작가… 등등과 같은 이미지로 우리에게 각인되어 있다. 헤세는 또한 독자들이 사춘기 시절에 뜨겁게 만나는 대표적인 작가이기도 하다. 아무리 책을 읽지 않는다고 해도 『수레바퀴 아래서』나 『데미안』을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의 소설에 나오는 수많은 명문장 역시 대중매체를 통해 회자되기 일쑤다. 그뿐일까? 우리나라의 소위 ‘훌륭한’ 분들 역시 공통적으로 “헤세에게 큰 감명을 받았다”고 고백한다. 심지어 “『데미안』을 읽기 전에는 부모와 조국에 대한 사랑을 제대로 모르고 공부도 게을리 했는데 그 책에서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는 구절을 읽고 별안간 대오 각성하여 열심히 공부해 육군사관학교에 가서 가장 빠른 나이에 장군까지 진급한 뒤 박정희 대통령을 받드는 정치인이 되었다”라고 말한 정치인도 있다. 그래서일까? 중고교 시절이나 대학시절 교양 필독서 목록에는 헤세의 책이 빠지는 법이 없다. 지극히 관념적인 자아 찾기, 작가의 평생을 지배했던 고독함, 개성에 대한 탐색은 어느덧 헤세를 상징하는 아이콘이 되어버렸다. 헤세는 정말 그런 작가일까?
헤세는 개인의 내면에만 천착했던 작가일까?
헤세는 부르주아적 삶을 경멸했으면서도 그 언저리를 맴돌았고, 전쟁을 반대하면서도 군대에 자원했고, 집단을 경멸하면서도 항상 그 주변을 서성거렸던, 한마디로 매우 약한 사람이었다. 어려서부터 정신병원을 들락거리다가 50세가 되어서는 자살을 시도했던 배경이다. 그런데도 우리나라에서는 그를 출세와 대오 각성을 위한 전기가 되어준 작가라거나 범접하지 못할 힐링의 묘수를 선사해주는 작가로 인식한다. 하지만 헤세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헤세가 말한 자아 찾기란 대중이라는 기계의 일부로 타락하지 말고 그 기계의 현실에 저항하라는 것이었다. 사실 세상의 어떤 작가도 개인의 내면에만 집착하지 않는 법이다. 어떤 개인도 사회와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헤세는 사회라는 체제가 개인을 억압한 우리 상황을 가장 절실하게 보여준 작가이다. 그 체제의 결과로 불거진 개인의 자살과 같은 비극을 내면 심리의 갈등이 아니라 사회의 부조리 때문에 생겨난 비극으로 보고, 그런 비극의 해결을 위해서는 인간 자신만이 아니라 사회를 혁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질 만능, 지식 만능, 권력 만능의 현실을 비판하면서 그의 어린 주인공 한스 기벤라트를 자살하게 만드는 수레바퀴를 부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헤세에 대한 사랑으로 흘러넘치는 천편일률적인 힐링용 책들이 홍수를 이루는 가운데 이 책이 유독 사회 변혁을 강력하게 주장했던 헤세의 참모습에 방점을 찍는 이유이다.
반항하라, 우리는 반항하기에 인간이다
저자는 화려한 연미복을 입고 힐링의 묘수를 전파하는 천재 소설가 헤세가 아니라, 노동자나 농부처럼 허름한 작업복을 입고 산속 포도밭에서 힘들게 일하며 소박한 수채화를 그리는 그의 참 모습을 소개한다. 헤세는 출세가 아니라 출가를 권했다. 헤세는 군대를 비롯한 인공의 조직이 아니라 순수한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힐링이나 안주가 아니라 방랑을, 안정이 아니라 끝없이 고뇌하라고 말했다. 그는 복종이 아니라 반항을, 집단이 아니라 개인을, 집단성이 아니라 개성을 믿었다. 나아가 헤세는 개성과 개인을 억압하는 모든 권력과 권위에 저항하라고 했다. 따라서 저자는 이 책을 읽는 사람들에게 헤세의 말을 빌어 “자신의 개성을 지키고 자신의 존재를 믿으라”고 말한다. 특히 청춘에게 “반항하라! 기존의 모든 것에 저항하라! 우리는 반항하기에 인간이다”라고 힘주어 강조한다. 자본주의에 철저히 저항하며 평화와 자연을 사랑한 헤세의 모습은 흡사 체 게바라를 닮았다. 긴 방랑 속에서 스스로 진실을 인식하고 책임을 자각하며 독립한 개인으로 굳게 서는 모습이 바로 헤세 삶과 작품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집단적 광기가 난무하는 황무지 같은 한국의 현실에서 우리가 당당한 개인으로 서기 위해 헤세를 다시 한 번 정독해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