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정보
붉은 칼

붉은 칼

저자
정보라
출판사
아작
출판일
2019-01-29
등록일
2019-04-15
파일포맷
EPUB
파일크기
0
공급사
북큐브
지원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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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에 뛰어들어 옆 사람의 잡은 손을

절대로 놓지 않는 그냥 보통의 평범하고 용감한 사람들의 이야기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본인의 죽음을 설명하는 방법을 그녀는 알지 못했다”



“살아서, 같이 여기서 나가자”

우주로 날아간 ‘나선정벌’ 이야기

《저주토끼》의 정보라 작가 7년 만의 장편소설



“소년은 아름다웠다.” 제국의 군대에 붙잡혀 어딘지도 모를 미지의 행성에 총알받이로 끌려가는 우주선에서 그녀가 견딜 수 있었던 건 붉은 머리의 아름다운 소년 덕분이었다. 소년은 그녀의 상처와 흉터와 흔적들을 모두 알고 있었고, 소년은 몇 번이나 그녀에게 괜찮은지, 정말로 괜찮은지, 진심으로 원하는지 되풀이해서 물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녀도 소년에게 괜찮은지 물었고, 소년은 그녀에게 사랑한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소년은 우주선에서 내리자마자 죽었다.



“그걸로 제국인을 죽여.” 죽은 소년이 나타나 자신의 총을 주며 말한다. 사랑을 잃은 그녀는 싸운다. 칼로 베고 찌르고 때리며 하얀 외계인과 싸우고, 검은 새와 싸우고, 총을 쏘며 제국의 회색 병사들과 싸운다. 그리고 언니들이 있다. 남색 치마의, 연녹색 치마의 언니들이 그녀와 함께 싸운다. 전쟁 노예로 끌려온 남자들과 함께 싸운다. 애초에 목적이 그랬던 것처럼 그들은 총알받이로 죽어 나간다.



그런데 죽었던 사람들이 다시 살아서 나타나기 시작한다. 죽었던 남자가 다시 나타나고, 남색 치마의 여자가, 연녹색 치마의 여자가, 그리고 그녀 자신이 또 나타나서 그녀와 함께 싸운다. 안 그래도 악몽과도 같은 전쟁에서,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지 그녀는 알지 못한다. 이 행성은 죽음이 존재하지 않는 땅인가. 이 전쟁에 끝은 있을까. “도망쳐. 전쟁 따위 필요 없어. 우린 이미 다 죽었어. 우린 모두 속았어.”



러시아를 비롯 슬라브어 권의 명작들을 꾸준히 번역해서 소개하고, 보태어 수준 높은 호러 SF/판타지 창작으로 꾸준히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온 정보라 작가의 여섯 번째 저서이자, 세 번째 장편소설이 7년만에 나왔다. 작가는, 17세기 청나라의 총알받이에 동원되었으나 기적적으로 러시아군을 물리치고 돌아온 나선정벌을 모티브로 하고, 그 세계를 우주로 확장해 몽환적이고 아름다운 전쟁 이야기를 엮어냈다.



작가는 말한다. “그래서 나는 나선정벌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소설을 쓰고 싶었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에 나오는 ‘제국의 모델은 스타워즈가 아니고 나선정벌의 원인 제공자인 청 제국이다. 그런데 나선정벌을 우주로 옮겨놓자마자 문제가 발생했다. 쓰다 보니까, 쓰면 쓸수록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어갔다. 그러나 소설이란 원래 그런 것이므로 딱히 문제라고는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계속 썼다.”



그렇게 우주로 날아간 나선정벌 이야기는, 정보라 작가만이 쓸 수 있는, 안개와도 같은 소설이 되었다. 이것이 호러인지, 무협인지, 판타지인지, 역사소설인지, SF인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소설이란 원래 그런 것이므로 딱히 문제라고는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이것은 그저 끝나지 않은 세상의 싸움에 내던져진 한 개인이 견뎌낼 수 있는 방법에 관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할 수 있다면,



“살아서, 같이 여기서 나가자”



어떤 전쟁 이야기



시기가 특정되지 않은 미래, 성간 여행이 가능한 우주 제국이 있습니다. 그리고 제국군에게 사로잡힌 포로들이 있습니다. 어떤 별에서, 이 포로들은 제국군을 위한 전투에 투입됩니다. 상대는 하얀 외계인입니다. 피부도 하얗고 피도 하얗고 그들이 사용하는 광선 무기의 빛 색깔도 하얗습니다. 누더기 같은 옷을 입은 포로들은 이 외계인들을 상대로 화약식 발사 무기(현대의 총에 가깝습니다)와 긴 칼을 사용합니다. 《붉은 칼》이기 때문일까요, 이 두 가지 병기 중에서는 칼의 비중이 높습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전투 묘사 중에 특히 백병전에 속하는 부분이 많기 때문이겠죠. 자신이 죽이려는(또한 나를 죽이려 하는) 상대와 가까이 접근할수록 전투와 살인 행위는 감정적인 소모를 필요로 합니다. 이렇듯 백병전에 참여하는 이들의 마음은 감정적으로 증폭되고 고조되며, 이 고조된 이들, 즉 칼을 비롯한 근접 병기를 잘 쓰는 이들이 《붉은 칼》을 이끌어 갑니다.



그리고 이 소설에서 백병전의 귀재들은 모두 여성입니다. 특히 감정적으로 깊은 진폭을 지닌 여성들이죠. 이들의 성격이 백병전에서 장점으로 작용했는지, 아니면 계속된 전투가 그들의 마음을 불안하게 흔들어 놓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연유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삶이란 그런 거니까요. 내가 어쩌다 지금의 내가 되었는지 자문하기에는 매일 다가오는 오늘을 살아가기가 만만치 않습니다. 전쟁 중이라면 더하겠지요. 고찰보다는 성능과 효과가 필요합니다. 선조치 후고찰입니다. 스토리 속의 결정적인 순간들은 백병전과 함께하며, 이는 자연스럽게 육체와 정신을 동시에 폭발시킵니다.



이 결정적인 순간 외에도 《붉은 칼》은 전투로 가득합니다. 화약 병기와 광선 병기들이 교차하고, 시체가 즐비하고, 전장이 되는 별에 사는 기묘한 토착 생물이 시체의 피를 빨아먹으며, 어째서인지 인간을 죽이려 드는 거대한 검은 새들이 날아다닙니다. SF임을 감안하면 특별하다고는 할 수 없는 설정입니다. 그런데 《붉은 칼》이 그려내는 전투 및 전후 상황 묘사가 독특합니다. 분명히 치열한 싸움인데, 이 싸움이 그려내는 이미지는 빛과 색채와 형태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칸딘스키풍의 추상이나 20세기 초 미래파의 회화를 떠올리게 하죠.



그래서 《붉은 칼》은 전쟁을 주요 소재로 하는 보통의 SF/판타지와는 다른 느낌을 안겨줍니다. 이 소설 속의 전장은 치열하게 꾸며진 추상 이미지의 전시장처럼 느껴집니다. 이 초현실적인 풍경 안에서 펼쳐지는 백병전은 무협 혹은 거기서 파생된 한국식 판타지 액션 씬과 닮아 있고요. 격렬하고도 상세한 행동 묘사와 ‘승리 포즈‘라고 할 법한 세레모니 행위까지, 이 역시 자신만의 방식으로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풍깁니다. 결국 《붉은 칼》을 지배하는 끝없는 전투의 이미지가 이 소설을 이끈다고 보아도 좋겠습니다. 어디서도 보기 힘든 독특한 감수성을 지닌 전투 장면들 말이죠.



이 독특한 전쟁 이미지를 통해 밝혀지는 스토리는, 옛날 조선 조총수들이 청나라에 차출되어 조청 연합을 이룬 뒤 러시아군과 싸웠던 나선정벌의 이야기를 기반으로 했다고 합니다. 춥고 낯선 땅에서 자신들을 업신여기면서도 필요로 하는 이들과 함께 싸워야 하는 운명이죠. 물론 《붉은 칼》의 이야기는 여기서 출발해 더욱 내밀한 쪽으로 움직입니다. 그러나 고독(에 기반한 결핍)이 주인공을 비롯한 인물들을 감싼 채 놓아주지 않는다는 것만큼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 결핍은 어디서 왔을까요? 작가의 말을 통해 우리는 해답을 엿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 전쟁의 이야기, 싸우는 이야기라는 점은 처음부터 끝까지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쓰다 보니까 이야기는 내가 아는 종류의 투쟁에 관한 이야기로 조금씩 자리가 잡혀갔다. 어떤 투쟁이든 그 싸움 전체는 나라는 한 개인보다 훨씬 크게 마련이고, 나는 그 안에서 내가 겪은 일들밖에 알지 못한다. 글을 쓰면서 나는 세월호 1주기를 많이 생각했다. 광화문 현판 아래 세월호 부모님들과 나의 동지들과 차벽으로 막힌 채 앉아 있던 것, 차벽 위로 물대포가 솟아오르고 차벽 사이로는 우리 편의 끝없는 깃발들이 보였던 것을 생각했다. 앉아 있는 우리를 향해 경찰이 줄지어 다가올 때 옆에 함께 앉아 있던 세월호 어머님하고 손을 꼭 잡았던 것을 생각했다. 민중총궐기를 생각했다. 고공농성 하시는 분들을 만나러 전광판 아래로 굴뚝 아래로 행진하던 것을 생각했다.”



《붉은 칼》은 17세기의 전쟁 이야기를 모티브로, 먼 미래 우주 낯선 외계 행성에서의 전쟁을 다루지만, 작가는 바로 지금 여기 이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을 말하고 싶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분명 같은 땅에서 살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같은 종족으로 취급받지 못하고 투쟁의 현장으로, 싸움으로 내몰린 그 모든 한 개인 개인들의 전쟁 같은 현실 말입니다. 수많은 싸움에서 이겼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다시 사지로 내몰리는 이 소설의 마지막 결말은 그래서 더욱 현실적입니다. 아무리 많은 싸움에서 이기거나 지더라도 아직 전쟁은 결코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요.



“탄핵 가결안이 통과되었을 때 국회 앞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이겼다! 이겼다!’고 외치던 목소리와 하늘을 향해 치켜든 수많은 주먹들을 생각했다. 그러나 한 개인은 정말로 작고, 그 개인이 던져진 세상은 크고 넓고 그 안에는 수많은 불의와 수많은 싸움들이 있었다. 그 싸움은 그렇게 쉽게 이길 수 있는 종류가 아니라는 사실을 나는 깨닫는다. 나를 지탱해주는 것은 그 안에서 나와 같은 일들을 함께 겪으며 내 손을 잡아주는 사람들이고, 나도 누군가의 손을 잡고 그렇게 누군가를 지탱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이 작품 《붉은 칼》은 꿈속의 이미지 같은 전장 속에서 결핍에 대해, 사회적 약자들에 대해, 여성들에 대해, 그리고 결국은 작가의 헌사 그대로, “인간의 존엄과 권리를 위해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을 견디는”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게 합니다. 어쩌면 낯설고 어쩌면 기묘하고 어쩌면 무서운 이 이야기를 통해, 작가는 동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손을 건네며 말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살아서, 같이 여기서 나가자.”



작가의 말



나선정벌(羅禪征伐)은 1654년과 1658년 두 번에 걸쳐 일어난 조선-청나라 연합군과 러시아 사이의 군사적 충돌이다. 원인은 영토분쟁이었는데, 신생국가였던 청나라는 쇠락해가는 명나라를 견제하면서 영토를 확장하려 했고, 러시아는 정치적 혼란과 이에 따른 경제 위기를 타파하기 위해 1580년대부터 시베리아로 진출하여 당시 서유럽에서 비싸게 거래되던 동물 털가죽을 수급하려 했다. 이 두 제국은 1650년대 초부터 충돌하기 시작했고 청나라는 병자호란 이후 속국이 된 조선에 지원을 요구했다. 조선은 청나라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국의 북쪽 지역을 지키기 위해서 총포수를 파견했다. 조선군은 1654년과 1658년 두 번 모두 승리했고, 1658년 제2차 나선정벌에서 러시아 측 지휘관인 오누프리 스테파노프(Онуфрий Степанов)가 사망하여 조선-청나라 연합군이 최종적으로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2차 나선정벌에 참여했던 함경북도 첨사 신유(申瀏)가 남긴 일기 《북정록(北征錄)》에 당시 상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 따르면 조선군은 러시아라는 국가가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몰랐으며 그저 북쪽에 사는 도적 떼 정도로 여기고 출정했다. 그런데 막상 러시아군을 마주하자 신유는 상대가 도적 떼가 아니고 제대로 편제를 갖춘 강력한 군대임을 알게 된다. 여기서 신유는 두려워하지 않고 그렇다고 적을 얕보지도 않고, 싸워볼 만한 상대라 존중하는 군인다운 태도를 보인다. 전투는 현재 중국의 흑룡강 인근에서 이루어졌는데, 1차 나선정벌 당시 조선군은 러시아군을 기습하여 하루 만에 승리를 거두었다. 그런데 2차 나선정벌에서 청나라 군대는 러시아 함대가 호위하고 있던 상선에 실린 물품을 탐내어 조선 총포수들에게 전투 중에 총을 쏘지 못하게 한다. 이 때문에 전사자가 없었던 1차 나선정벌과 달리 2차 나선정벌에서는 8명의 전사자와 26명의 부상자가 발생한다. 신유는 피해자들의 이름과 고향을 하나하나 기록했다. 전투가 끝난 뒤에 청나라군은 신유에게 전사자의 시신을 태워버리라고 하는데, 신유는 조선의 관습대로 전사한 부하들을 정중히 매장해준다.



신유에게는 2차 나선정벌 전투가 승리로 끝난 이후에 더 큰 고난이 찾아왔다. 청나라는 1차 나선정벌 이후 조선군의 지원 없이 자체적으로 러시아군 기지를 공격했다가 패배한 이력이 있다. 이 때문에 2차 나선정벌이 끝나자 청나라에서는 그 기세를 몰아 조선군 지원병들과 함께 러시아군의 시베리아 기지로 진격하고 싶어 했다. 반면 신유는 전승을 거두고 임무를 완수했으니 부하들을 더 고생시키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신유는 일주일에 걸쳐 청나라의 진격 요구를 거절하고 청군을 설득한 끝에, 겨우 러시아군이 사용하던 조총 한 자루를 전리품으로 얻어 결국 고향으로 돌아온다. 신유가 받아온 이 러시아군의 조총은 러시아와 조선이 1860년 정식으로 수교를 맺기 200년 전에 러시아와 조선이 이미 공식적으로 역사에 남은 접촉을 가졌다는 중요한 증거품이다.



그러니까 나는 이 조총이 그 뒤로 어떻게 됐는지 너무나 궁금했다. 그리고 나선정벌은 그 자체로 드라마틱한 영웅 서사의 요소들을 모두 갖춘 완벽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1차 나선정벌을 이끌었던 변급(邊?)과 2차 나선정벌을 이끌었던 신유는 인종도 언어도 문화도 사고방식도 전투방식도 전부 다른 러시아의 군대를 처음 마주쳤을 때 외계인을 마주친 기분이 아니었을까? 나는 특히 신유가 마음에 들었다. 자신과 함께 싸우다 이국땅에서 스러진 동료들의 죽음을 애도하며 조국의 관습대로 매장한 사실이나, 전사자들의 이름과 고향을 하나하나 일기에 기록하며 비통해한 것, 부하들의 목숨을 담보로 청나라에 잘 보여 입신양명하겠다는 허영심 없이 그저 할 일을 해내고 고국에 돌아가고 싶어 한 것, 그리고 군인으로서 무기에 관심을 보여 비싼 털가죽도 금은보화도 아닌 러시아군의 총을 갖고 싶어 했던 것 등등, 훌륭한 군인이었던 것 같고, 좋은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나선정벌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소설을 쓰고 싶었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에 나오는 “제국”의 모델은 스타워즈가 아니고 나선정벌의 원인 제공자인 청 제국(1618~1924)이다. 그런데 나선정벌을 우주로 옮겨놓자마자 문제가 발생했다. 쓰다 보니까, 쓰면 쓸수록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어갔다. 그러나 소설이란 원래 그런 것이므로 딱히 문제라고는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계속 썼다.



어쨌든 전쟁의 이야기, 싸우는 이야기라는 점은 처음부터 끝까지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쓰다 보니까 이야기는 내가 아는 종류의 투쟁에 관한 이야기로 조금씩 자리가 잡혀갔다. 어떤 투쟁이든 그 싸움 전체는 나라는 한 개인보다 훨씬 크게 마련이고, 나는 그 안에서 내가 겪은 일들밖에 알지 못한다. 글을 쓰면서 나는 세월호 1주기를 많이 생각했다. 광화문 현판 아래 세월호 부모님들과 나의 동지들과 차벽으로 막힌 채 앉아 있던 것, 차벽 위로 물대포가 솟아오르고 차벽 사이로는 우리 편의 끝없는 깃발들이 보였던 것을 생각했다. 앉아 있는 우리를 향해 경찰이 줄지어 다가올 때 옆에 함께 앉아 있던 세월호 어머님하고 손을 꼭 잡았던 것을 생각했다. 민중총궐기를 생각했다. 고공농성 하시는 분들을 만나러 전광판 아래로 굴뚝 아래로 행진하던 것을 생각했다.



탄핵 가결안이 통과되었을 때 국회 앞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이겼다! 이겼다!”고 외치던 목소리와 하늘을 향해 치켜든 수많은 주먹들을 생각했다. 그러나 한 개인은 정말로 작고, 그 개인이 던져진 세상은 크고 넓고 그 안에는 수많은 불의와 수많은 싸움들이 있었다. 그 싸움은 그렇게 쉽게 이길 수 있는 종류가 아니라는 사실을 나는 깨닫는다. 나를 지탱해주는 것은 그 안에서 나와 같은 일들을 함께 겪으며 내 손을 잡아주는 사람들이고, 나도 누군가의 손을 잡고 그렇게 누군가를 지탱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그리고 가능하면 멋있게 쓰고 싶었다. 그래서 총싸움도 하고 칼싸움도 했는데 그리하여 SF를 가장한 무협지가 되었다. 쓰면서 재미있었으니까 후회는 없다.



나선정벌은 이후 어떻게 되었느냐면, 1700년대 조선에서 히트친 판타지 소설이 되었다. 조선은 임진왜란(1592~1598)을 겪고, 병자호란(1636~1637)을 겪고, 삼전도의 굴욕을 겪고 왕자 중 한 명이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가는 수모를 줄줄이 겪은 끝에 나선정벌이라는 작은 승리를 거두었다. 게다가 조선을 그토록 짓밟고 속국으로 만든 청나라조차 이기지 못했던 강력한 미지의 외적을 변방의 이름 없는 총포수들이 물리친 것이다. 이 이야기는 열패감에 젖어 있던 조선 지식인들의 관심을 끌어 1700년 초부터 두세 번쯤 소설화되었다. 그러다가 신유의 후손이 직접 나서서 신유가 남긴 《북정록》과 이전에 출간된 한글판 소설을 엮어서 전쟁판타지 액션 로망으로 다시 쓰게 된다. 나선정벌이 소설로 거듭나면서 허구의 전투는 규모가 점점 커지고 실제로는 없었던 이국적인 동물들과 아름다운 러시아 여자들이 난데없이 등장하는 가운데 신유를 모델로 한 주인공은 장대한 전투에서 엄청난 패배를 거듭하던 청나라를 바람같이 나타나서 구원해주는 천하의 ‘수퍼솔저’로 묘사된다.



내가 아는 싸움들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난세와 영웅의 관계에 관한 여러 가지 명제들이 존재하지만, 가만 보면 어느 시대나 모두 난세인 것 같다. 내가 살아가는 난세에서 내가 아는 영웅은 수천의 대군을 호령하는 장수가 아니라 끝이 보이지 않는 움에 뛰어들어 옆 사람의 잡은 손을 절대로 놓지 않는 그냥 보통의 평범하고 용감한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그런 분들이 현실에서 승리하는 날이 오기를 기원한다. 간절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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