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락한 저항
한국사회에서 벌어진 세 가지 사건을 중심으로 진지함과 생각에 대한 혐오, 반지성주의가 어떻게 소수자와 약자를 향한 혐오와 차별과 결합하는지, 표현의 ‘자유’와 저항할 ‘권리’의 관계를 살피는 책이다. 특히 이러한 흐름이 보수와 진보, 거대악과 그에 대응하는 저항이라는 이분법과 결합하며 저항과 피해자라는 보편의 위치를 누가 점하고 누구의 목소리가 지워지는지 치밀하게 짚어낸다.
반지성주의란 지식이 없는 무지한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알기를 거부하는’ 태도를 말한다. 가령, 혐오 발화자들을 보면 그들은 혐오하는 대상을 모르기 위해 애쓴다. 혐오 발화를 하는 이들도 나름 지식으로 무장한다.
기득권 유지를 위해 자신이 알고 싶지 않은 문제를 적극적으로 ‘모르려고’ 하며, 시대에 맞는 새로운 ‘마녀’인 ‘충’을 계속 만들어내 인간사회에서 몰아낸다. 나아가 정치적 올바름과 진지한 성찰은 폭로, 재미 앞에서 쉽게 솔직하지 못한 ‘위선’이 되고, 불편한 진실은 외면한 채 마치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것 같은 ‘취향’이라는 단어와 ‘표현의 자유’라는 외피를 두른 ‘혐오의 자유’라는 차별이 횡행한다.
알기를 거부하는 반지성주의의 시대,
지성의 복원을 향한 불편한 목소리
“다만 질문하고 생각한다.
기존 질서를 움켜쥐려고 알기를 거부하는 현상에 대해.
권력에 저항한다면서 다른 방식으로 권력 행위를 하는 모순에 대해.”
반지성주의의 풍토
올해 초, 한 코미디언이 제작한 동영상 하나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른바 ‘PC’, 즉 ‘정치적 올바름’을 ‘놀리는’ 동영상이었다. ‘엄마 아빠는 PC충’이라는 제목으로 올라간 이 영상에는 한 한국인 여성이 남자친구인 백인남성을 부모에게 소개하는 상황이 그려지는데, ‘PC충’으로 그려지는 그 부모는 딸의 남자친구가 ‘백인’이라는 것에 대해 ‘소수민족’이나 ‘흑인’ 남자친구에는 관심이 없느냐고 딸에게 묻고, 딸의 남자친구가 쓴 ‘병자호란’을 주제로 한 책을 읽고서는 왜 책에 주체적으로 행동하는 흑인이 한 명도 없느냐며 비판한다. 맥락에 맞지 않게 무조건 ‘정치적 올바름’을 주장하는 부모를 황당하게 그리며 ‘PC충’, ‘진지충’을 ‘깐다’. 최근에는 ‘쓸모는 없고 쓸데없이 진지한’ 인문학 전공자들을 멸시하는 ‘문과충’이라는 말까지 유통되고 있다.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고, 고민하고 성찰하는 태도, 그것을 배우는 학문은 이제 ‘충’이라는 이름이 붙어 놀림감이 된다. “생각하고 의문을 제기하는 태도 자체가 조롱의 대상이다. ‘진지충’을 조금 순화해 ‘진지병’이라 부르기도 한다. 다른 표현으로 ‘선비질’, 더 상스럽게 말하면 ‘씹선비’라고 한다.” 엘리트나 식자층의 권위주의나 엘리트주의에 대한 반발이라고만 보기 어렵다. 이는 소수자와 약자를 볼모로 삼은 창작이나 저항 방식에 대한 비판마저 엄숙주의자, 도덕주의자, 나아가 위선자 등으로 낙인찍는 상황으로 번져나간다.
소수자성에 대한 민감함과 예민함으로 사회를 감지하며 우리 사회에 ‘불편한 목소리’를 발화해온 저자 이라영은 『타락한 저항』을 통해 한국사회의 반(反)지성주의, 그리고 반지성주의의 풍토에서 자라난 혐오와 차별을 날카롭게 짚어낸다.
이 책에서 말하는 반지성주의란 지식이 없는 무지한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알기를 거부하는’ 태도를 말한다. 가령, 혐오 발화자들을 보면 그들은 혐오하는 대상을 모르기 위해 애쓴다. 혐오 발화를 하는 이들도 나름 지식으로 무장한다. 다만 알고 싶지 않은 문제를 적극적으로 모르려고 할 뿐이다. 지금 한국사회에서 끊임없이 등장하는 말들을 보자. ‘남성이 역차별을 받는다’, ‘‘종북’과 ‘귀족노조’가 나라를 망친다’, ‘동성애 때문에 에이즈가 창궐한다’. 기득권 유지를 위해 자신이 알고 싶지 않은 문제를 적극적으로 ‘모르려고’ 하며, 시대에 맞는 새로운 ‘마녀’인 ‘충’을 계속 만들어내 인간사회에서 몰아낸다. 나아가 정치적 올바름과 진지한 성찰은 폭로, 재미 앞에서 쉽게 솔직하지 못한 ‘위선’이 되고, 불편한 진실은 외면한 채 마치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것 같은 ‘취향’이라는 단어와 ‘표현의 자유’라는 외피를 두른 ‘혐오의 자유’라는 차별이 횡행한다.
“사회의 야만은 약자 멸시에 담겨 있다. 지성은 사회의 가장 취약한 부분을 향해 치밀한 관심을 동반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고립되기를 두려워하지 않되, 현실에 참여하기를 게을리하지 않는 태도가 중요하다. 참여하되 구속받지 않아야 한다.” _196쪽
지배하는 피해자, 타락한 저항의 탄생과 진화
지성이 약자를 향해야 한다는 것에 비추면 지성에 대한 적극적 거부는 약자를 조롱하고 혐오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폭력이며 결국 누가 권력을 갖고 발화하는지를 보여주는 잣대이기도 하다. 이 책은 한국사회에서 벌어진 세 가지 사건(박근혜 정권하에서 벌어진 문화예술계의 ‘블랙리스트’ 사건과 이에 대한 저항의 방식, 이명박 정권하에서 탄생해 박근혜 정권, 문재인 정권 집권까지 이어진 〈나꼼수〉 현상, ‘메갈리아’라는 저항의 방식을 둘러싼 현상)을 중심으로 진지함과 생각에 대한 혐오, 반지성주의가 어떻게 소수자와 약자를 향한 혐오와 차별과 결합하는지, 표현의 ‘자유’와 저항할 ‘권리’의 관계를 살핀다. 특히 이러한 흐름이 보수와 진보, 거대악과 그에 대응하는 저항이라는 이분법과 결합하며 저항과 피해자라는 보편의 위치를 누가 점하고 누구의 목소리가 지워지는지 치밀하게 짚어낸다.
문화예술계를 뒤흔든 박근혜 정권하에서의 ‘블랙리스트 사건’에서는 문화예술과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보수 정권의 제도적 검열과 이 검열에 맞서 혐오 발화를 동반한 저항이 짝패를 이루어온 과정을 살피고, ‘나꼼수 현상’을 통해서는 노무현의 죽음 이후 이어진 10여 년간의 보수 집권 시기에 이기는 정치를 향한 욕망이 반지성주의를 어떻게 더 강화했는지, ‘적폐’와 ‘우리 편’의 이분법적 구도와 팬덤 정치 속에서 지워진 다양한 목소리와 정당화된 혐오, 검증 없는 진실의 선동 등을 밀도 있게 파고든다. ‘메갈리아’를 살펴보면서는 이 시대 새로운 ‘종북 빨갱이’가 된 ‘메갈리아’를 둘러싼 마녀사냥과 좌우 진영을 넘어서 ‘진짜’ 페미니스트를 감별하려는 흐름 속에 나타나는 여성혐오, ‘남혐’과 ‘여혐’이라는 구도를 짜면서 ‘혐오에 혐오로 대항하는 것은 안 된다’는 논리로 여성의 분노를 혐오로 번역하는 방식, 여성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스스로 지성을 퇴보시키는 자칭 ‘진보’의 모습,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모르기 위해 ‘나를 설득해봐라’라는 반지성적 태도 등의 주제를 비판적으로 다룬다.
이 세 사건은 2000년대 이후 한국사회의 여러 사건 중 일부다. 하지만 이 사건들을 관통하는 반지성주의와 혐오의 결합은 지금도 반복되는 어떤 패턴이다. 보수 정권은 시민 개인의 자유를 제도적으로 억압하고, 이에 저항하는 ‘진보’ 진영은 그 과정에서 약자를 향한 혐오를 정당화하는 패턴, 보수와 진보라는 이분법적 구도 속에서 대의를 위해 약자와 소수자의 목소리(가령 노동자와 여성을 비롯한 소수자)는 지워지거나 ‘나중에’ 처리되어야 하는 부차적인 것이 되는 패턴, 내지는 적폐로 상징되는 거대악의 피해자이자 저항의 주체는 남성의 얼굴을 한 채 보편의 위치를 점하고는 페미니즘을 억압하는 패턴. ‘지배하는 피해자’, ‘타락한 저항’의 모습이다. 혐오와 차별이 ‘저항’으로 둔갑하는 모습은 익숙하다. 여기에 ‘취향’과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혐오의 자유’까지 횡행한다.
이 ‘타락한 저항’ 뒤에는 생각하는 인간, 지성, 진지함을 조롱하는 반지성주의의 흐름이 존재한다. 소재가 무엇이든 웃기면 그만이고, 그 웃음이 적절치 않다고 정색하는 건 쿨하지 못하고 솔직하지 못한 ‘프로 불편러’다. 차별은 솔직한 것이고, 차별을 지적하는 건 위선이 된다. 강성노조 때문에 재벌이 해외로 나간다는 발언, 성차별적 언행, 여성정책 토론회에서 졸다가 젠더 폭력이 뭐냐고 물으면서도 그 모름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전 자유한국당 대표 홍준표를 두고 ‘웃기는 시골 영감’ 같은 재미와 솔직함을 찾고 인간적이라고 평가하는 것, 이민자, 여성, 장애인 비하 발언을 쏟아내는 미국 대통령 트럼프를 두고 ‘솔직하다’라고 평가하는 것과 국정농단의 주범인 박근혜 전 대통령을 조롱하며 2016년을 ‘병신년’이라고 언급하며 낄낄거리는 태도, 맥락 없는 누드와 출산이라는 소재로 박근혜에 ‘저항’하는 ‘작품’ 사이에 얼마나 큰 거리가 있을까? ‘가짜 뉴스’와 사실의 검증은 나중이고 폭로와 음모론이 난무하는 ‘진보적’ 대안 언론, 소영웅주의에 빠져 타인의 고통보다 발화자인 자신을 앞세워 진실을 선동하는 ‘진보적’ 무비저널리즘과의 거리는 얼마나 멀까?
누구의 목소리도 지워지지 않는 사회를 향한 지성과 정치의 복원
적극적으로 알기를 거부하고 진지한 성찰과 생각함을 비웃는 반지성적 문화, 그리고 저항이라는 명목과 권위에 도전한다는 명목으로 벌어지는 무책임하고 선동적이며 차별적인 권력 행위, 표현의 자유로 포장된 ‘차별과 혐오의 자유’가 횡행하는 지금을 짚으며 저자는 “제도적으로 통제와 억압이 자행되고 일상에서는 조롱과 혐오로 점철된 언어의 공격 속에서 수치심은 소수자의 몫으로 고립되고 있다”는 걸 강조한다. “‘이해’는 언제나 약자의 몫으로 남는다. 성소수자는 이성애 사회를 이해해야 하며, 여성은 가부장제를 이해해야 하며, 장애인은 비장애인을 이해해야 한다. 반면 이해받는 이들은 조심할 필요 없는 권력을 휘두른다.”
그리고 나아가 “솔직함을 빌미로 만만한 타인에 대한 조롱과 혐오 발언이 유머로 유통되고 있다면, 이 사회가 타인의 고통을 대하는 자세는 어떠한”지 우리에게 묻는다. 유머와 애도는 한 사회의 윤리와 지성의 척도이기 때문이며, 타인의 고통을 대하는 자세는 많은 고민과 학습, 자기 성찰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마치 약자를 조롱하는 것이 유머로 소비되는 것처럼, 타인의 고통을 타자화하는 태도 역시 경계한다. “때로 공감하고 연대한다는 명목으로 타인의 고통 앞에서 슬퍼하는 나, 고통스러운 사안 앞에서 몸부림치는 나를 드러내는 경우가 있다. 누군가의 고통을 말하며 결국 자신을 드러낸다. 누군가의 비극을 자신의 정의감의 매개로 삼는 행위는 일종의 속임수다. 정치 예능이나 무비 저널리즘 형식은 이러한 문제를 꾸준히 드러냈다.”
저자는 “유머, 곧 해학·풍자·농담 등이 사회의 약자를 조롱하는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애도가 타인의 고통을 타자화하는 방식에 머물고 있다면 사회의 윤리적 기준에 의구심을 품어야 한다. 전위적인 지성과 미학은 윤리적 고민을 품는다. 합리적 의심과 음모론, 배려와 위선, 전위와 무례, 평등과 획일화는 전혀 다른 개념이지만 그들 사이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다. 그렇기에 그 아슬아슬한 경계선을 찾아 위태롭게 걸어가는 길이 지성의 역할이다”라며 우리에게 지성의 복원을 주문한다. 우리가 결국 지성의 복원을 말해야 하는 건 사회의 야만이 약자 멸시에 담겨 있으며 지성이 바로 사회의 가장 취약한 부분에 시선을 돌리고 치밀한 관심을 동반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누구의 목소리도 지워지지 않는 사회를 위한 지성과 저항의 복원을 고민하는 독자들에게 이 책의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