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가 있다
‘윤동주 산문’을 통해 그의 삶을 펼쳐낸 최초의 책
윤동주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의 산문에 주목해야 한다!
“고통에서 사랑을, 어둠에서 빛을 탄생시키는 터널 끝의 낙관주의가 윤동주 산문의 자화상이다.”
- 이어령 평론가
“그의 산문을 읽으면 멈춰 선 전차가 꿈꾸는 풍경이 보인다.”
- 이준익 감독
“『나무가 있다』를 펼쳐보는 일은 시인의 그 형형한 눈빛을, 우리가 처음 마주하는 일 같습니다.”
- 박준 시인
윤동주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의 산문에 주목해야 한다!
이어령 평론가, 이준익 감독, 박준 시인 추천
‘윤동주 산문’을 통해
그의 삶을 펼쳐낸 최초의 책
윤동주는 암담한 식민지 시대를 살아가며 조국의 현재를 걱정하면서도, 인간에 대한 사색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휴머니티가 고스란히 묻어 있는 시들을 읽는다면 누구라도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서시」, 「별 헤는 밤」, 「참회록」은 중고등학교 교과서에도 나오고, 종종 영화나 광고를 통해 만나기도 하는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다. 윤동주가 남긴 시를 독해하며 그의 삶을 풀어낸 책은 많았지만, 산문을 통해 그의 삶에 접근하는 책은 이제까지 없었다. 『나무가 있다』는 윤동주의 산문 네 편을 되짚어보며, 그가 걸었던 고뇌의 경로를 좇는 최초의 책이다.
“윤동주의 산문을 읽으면 비에 젖은 나무가 되어 젖은 흙으로 잔뿌리 내리는 기분이다. 그가 쓴 산문에는 온갖 꽃과 식민지 시절 경성의 풍경, 『주역』의 우주가 펼쳐져 있다.
그를 좋아하는 이들은 대부분 그의 시만 좋아할 뿐 그가 산문을 썼다는 사실을 잘 알지 못한다. 부끄럽게도 나도 그의 산문을 건성으로 읽었었다. 『처럼-시로 만나는 윤동주』(문학동네, 2017.)를 내고, 대충 읽었던 산문을 한 편 한 편 밑줄 치며 읽기 시작했다.
그의 산문은 그의 시와 뿌리끼리 엉켜 있다. 산문은 그의 시와 다른 세계다. 또 다른 숲이다. 이십 대 초반의 청년이 아니라, 칠십 대 노인이 쓴 극진한 이야기 같다.
‘좋은 작가의 글은 어린이에게는 노래가 되고, 청년에게는 철학이 되고, 노인에게는 인생이 된다.’
어느 대문호가 말했다는 이 구절을 완성시킨 이가 윤동주다. (……) 이 책은 첫 장면부터 독자를 누상동 9번지 하숙집으로 안내한다. 3호선 경복궁역에서 내리면 걸어서 이십 분 정도 걸리는 곳이다. 연희전문 4학년 때 누상동 하숙집에서 살면서 그는 산문 「종시」를 썼다. 이 책에서 산문 4편을 「종시」, 「달을 쏘다」, 「별똥 떨어진 데」, 「화원에 꽃이 핀다」의 순서로 풀어보았다.
미리 말하건대 그의 산문은 사이다처럼 시원하거나 아이스크림처럼 달콤하지 않다. 요즘 감각으로 읽으면 틀린 문장도 보인다. 몇 줄 읽다가 그만둘 수도 있는 글이다. 설명이라도 쉽게 읽으시면 해서 ‘~습니다’ 체를 쓰기로 했다. ‘~습니다’로 쓰면 응집력이 떨어지지만, 더 많은 사람들이 읽기 바라며 이 방식을 택하기로 했다. 이 머리글 이후로는 모두 ‘~습니다’로 깁고 다듬었다. 인용한 그의 산문은 『윤동주 자필시고전집』(민음사, 1999.)에 실린 원문을 현대문으로 바꾼 글이다. 각 장마다 나오는 본문은 윤동주가 썼던 원문 그대로 옮겼기에 낯설 수도 있겠다. 원문에는 한자가 많아 그대로 읽기는 쉽지 않다. 현대어로 바꾸되, 한자를 써서 강조했던 윤동주의 의도를 생각하여 한자를 괄호 안에 넣어 살렸다. 읽기에 불편할 수 있지만 원문만이라도 윤동주의 의도에 가깝게 드러내고 싶었다.”
-프롤로그에서
윤동주의 산문을 읽는 순간
또 다른 숲에 들어섰다
한때 김응교 저자는 윤동주를 과잉평가된 시인 중 한 명으로 보던 때가 있었다. 어느 날부터인가 절망하고 있던 때 윤동주가 쓴 글들이 말을 걸었다. 미음 떠먹듯 조금씩 그의 글에 밑줄을 그었다. 그렇게 윤동주를 오랜 시간 공부해온 저자는 그의 산문 한줄 한줄, 행간 속의 흔적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고 세밀하게 연구했다. 때로는 방대한 자료조사를 통해서, 때로는 오랜 연구 끝에 찾아온 통찰을 통해서, 곡진한 언어와 섬세한 감수성으로 독자와 윤동주의 거리를 좁혀나간다.
동양철학에서부터 실존주의, 휴머니티, 오지 않을지도 모를 희망을 끊임없이 노래했던 낙관주의, 긴 시간을 몸으로 일일이 익혀가며 써내려간 ‘신체적 글쓰기’에 이르기까지, 저자는 시에서는 헤아려볼 수 없었던 윤동주의 전혀 다른 면모를 윤동주 산문을 통해 해석하고 펼쳐낸다.
「종시」는 윤동주가 연희전문 4학년 때 쓴 산문으로, 그가 학교에서 집으로, 다시 집에서 학교로 오갔던 경성 풍경을 상세하게 옮긴 글이다. 남대문 근처에서 보았던 서민과 밤늦게까지 철길에서 공사를 했던 노동자를 바라보는 윤동주 특유의 휴머니티가 담겨 있다.
「달을 쏘다」는 연희전문 기숙사 핀슨홀에서 지내는 적막함과 그의 고요한 내면이 기록된 산문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미묘한 감정, 친구가 먼저 이별을 고했던 상황에 서러워진 심경이 드러나는데,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표면적 묘사 속에 숨은 윤동주의 성숙하고 강력한 내면이다. 자조적이고 우울한 ‘내면의 달’과 헛것으로 빛나고 있는 ‘외부의 달’을 깨부수겠다는 강한 역동이 “무사의 마음을 먹고 달을 쏘다”라는 마지막 문장으로 마무리되는데, 이 문장은 윤동주의 산문 중에서도 백미로 꼽힌다.
「별똥 떨어진 데」도 「달을 쏘다」와 같이 윤동주의 강한 내면을 보이는 산문으로, ‘내 몸을 어디에 던져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기투를 보인다. 그가 좋아했던 『맹자』의 대장부 정신, 이웃과 벗이었던 나무와 숲의 풍경, “행동할 수 있는 행동을 자랑치 못”했던 자조와 반성의 목소리가 윤동주를 옹골차게 보이게 한다.
「화원에 꽃이 핀다」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바뀌는 우주 얘기로 시작하는 다소 추상적인 산문이다. 한학에도 정통했던 윤동주의 학자적 면모를 보이는 글로, 동양정신의 핵심인 『주역』사상을 풀이하며 쓴 글로 보인다고 저자는 해석한다. “서릿발에 끼친 낙엽을 밟으면서 멀리 봄이 올 것을 믿습니다.”라는 마지막 문장에는 내내 겨울을 살았으면서도 봄이 올 것을 언제나 믿었던 그의 성정이 어려 있다.
윤동주의 시가 감당할 수 없는 순수와 자조적 정서를 노래했다면, 산문은 거침없이 과감하게 다짐하는 청년의 용기, 강한 역동성, 비관 속에서 도약하는 낙관을 읊었다.
윤동주에게 글쓰기는 곧 목숨이었다
윤동주는 글을 제대로 쓸 줄 아는 청년이었다. 한 해 동안을 두뇌가 아니라 몸으로 일일이 헤아려 세포 사이마다 간직해두어서야 가까스로 몇 줄의 글을 얻었던 그에게, 글쓰기는 곧 목숨이었다. 윤동주는 깨어 있는 모든 시간을 글에 집중했다. 생활 전부가 그의 창작의 산실이었다는 것을 증명하듯 그는 교실과 하숙방, 기숙사, 나무숲 속에서 사색하고, 그 흔적을 글로 남겼다.
인생 전체를 일제강점기에서 살다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절명한 후쿠오카 형무소까지의 삶을 윤동주의 산문과 함께 따라가다 보면, 어처구니없지만 끝까지 공격하고 무지막지하게 희망을 걸어보려는 태도를 지닌 한 영혼을 만나게 된다.
이를 김응교 저자는 멜리사 그레그의 ‘정동이론’으로 해석해내고, 니체의 ‘자유로운 허무주의자’, 또는 김수영의 ‘온몸 시론’으로 풀어낸다. 윤동주의 삶과 산문은, 멀리 봄이 올 것을 믿으며 어둠을 온몸으로 밀고나가는 ‘잔혹한 낙관주의’와, 몰락하는 자로서 살아가고자 했던 ‘결심’ 이 동일한 의미라는 것을 알게 한다.
그래서 『나무가 있다』는 인간이 어떻게 살고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에 대한 텍스트로도 읽힌다.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고자 했던 그의 휴머니티가, 저자의 읽기 쉬운 해석과 함께 지극한 정성으로 펼쳐져 있다. ‘등불을 밝혀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렸던 윤동주 문학의 순수가 오늘을 사는 데도 유효한 양식이 되어줄 것이다.
◎ 추천사
윤동주의 글은 공간성으로 볼 때 땅에서 하늘로 오르는 언덕길이 되며, 시간성으로 볼 때는 과거에서 미래로 향하는 도상의 현재가 된다. 그의 감정은 부정에서 긍정으로 어느새 역전되어 있는데 이를 김응교 저자는 ‘잔혹한 낙관주의‘로 이름 붙였다. 고통에서 사랑을, 어둠에서 빛을 탄생시키는 터널 끝의 낙관주의가 윤동주 산문의 자화상인 것이다.
_ 이어령, 문학평론가/초대 문화부 장관
사색 깊은 청년이 식민지 시대에 희망을 품고 기다린 인생의 정거장은 바로 다음에 도착할 시대였다. 그 시대를 6개월 앞두고 멈춰 선 윤동주의 전차는 기차가 되지 못했다. 1941년 「종시」라는 산문의 전차 속에 남아 있는 윤동주의 마음은 수오지심으로 가득한 시가 되었다. 그의 산문을 읽으면 멈춰 선 전차가 꿈꾸는 기차가 보인다.
_ 이준익, 영화감독
다사로운 볕가로 자주 나와 앉아 있는 것이 윤동주의 시라면, 그의 산문은 서늘한 기슭 언저리를 오래 서성이는 것만 같습니다. 시인은 목숨 하나만을 들고 시와 산문의 길을 오갔을 것이고, 오가며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았을 것입니다. 『나무가 있다』를 펼쳐보는 일은 시인의 그 형형한 눈빛을, 우리가 처음 마주하는 일 같습니다.
_ 박준, 시인
◎ 책 속에서
윤동주의 산문을 읽으면 비에 젖은 나무가 되어 젖은 흙으로 잔뿌리 내리는 기분이다. 그가 쓴 산문에는 온갖 꽃과 식민지 시절 경성의 풍경, 『주역』의 우주가 펼쳐져 있다. _7쪽
시는 발표할 수도 있지만, 일기는 발표 자체를 염두에 두지 않는 비밀 기록입니다. 윤동주는 「종시」를 발표하지 않았어요. 발표하려 했다면 더 수정했을지도 모르지요. 거꾸로 발표하지 않았기에 오히려 윤동주의 내면이 있는 그대로 일기처럼 드러난 산문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_28쪽
원고지를 보면, 노동자는 “건설의 사도”라고 한 뒤, “땀과 피를 아끼지 않는다”고 한 문장 다음이 예리한 칼로 자른 듯 잘려 있습니다. 윤동주가 다른 원고지에서 이런 적이 없기 때문에 당혹스런 흔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도려진 자국’에 있었을 ‘삭제된 부분’의 내용은 제한적 조건으로 이어받고, 다시 이를 다음 문장에 넘겨주고 있는 셈입니다. _83쪽
“갈대로 화살을 삼아 무사의 마음을 먹고 달을 쏘다.”라는 마지막 문장이 산문 전체를 통합하는 윤동주의 「달을 쏘다」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주머니 속에 넣고 다니고 싶을 만한 구절들이 반짝이는 글입니다. 이십대 초반의 윤동주가 가진 고뇌와 단호한 심리를 잘 드러낸 산문이지요. _98쪽
서생(書生)은 공부하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세상일에 어두운 선비라는 역설적인 의미도 있겠지요. 결국 윤동주가 젊고 아직 세상 물정을 모른다며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어 표현한 말입니다. 이다음 문장은 명문(名文)입니다. “우정이란 진정 위태로운 잔에 떠 놓은 물이다.” _115쪽
더욱 주목해야 할 것은 이러한 표면적 묘사 속에 숨어 있는 그의 성숙하고 강력한 내면입니다. 그 모든 부정적이고 우울한 내면의 달과 헛것으로 빛나고 있는 외부의 달을 깨부수겠다는 마지막 문장은 백미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뒷부분에서 글은 점점 강한 분위기를 보입니다. “죽어라고 팔매질”, “통쾌”, “꼿꼿한”, “띠를 째서”, “탄탄한 갈대”는 이 산문의 앞부분에서 볼 수 없었던 강한 역동성(逆動性)을 보이는 표현입니다. _131쪽
꽃과 풀과 대화했던 윤동주에게는 나무도 귀한 대화 상대였습니다. 연희전문에 입학하기 전에도 나무는 등장합니다. ‘나무 가지 위에 하늘이 펼쳐 있다’( 「소년」), ‘눈 내리는 저녁에 나무 팔러 간/우리 아빠 오시나 기다리다가’( 「창구멍」) 등에서 나무는 늘 그의 곁에 있습니다. _159쪽
자조와 반성의 목소리는 그를 폐쇄적으로 만들지 않고 오히려 더 옹골차게 보이게 합니다. 그 이유는 그가 늘 글 끝에 “무사의 마음으로 달을 쏘다”(「달을 쏘다」)나 “별똥 떨어진 데가 내가 갈 곳인가 보다”(「별똥 떨어진 데」)라며 다짐으로 맺고 있기 때문입니다. _167쪽
깜깜한 식민지에서 견디며 살아가는 자신과 이웃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간절하면 이런 표현이 나올까요. “꼭 떨어져야 할 곳에 떨어져야 한다.” _176쪽
이 추운 겨울에도 아직 화롯가가 있다는 희망을 따스하게 표현하며 마무리합니다. 윤동주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조용하지만 악착같이. 이상이견빙지. _23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