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소개
저자 : 탁양현
이러하므로, 철학은 ‘구라’다.
온갖 차이diff?rence들을 알아차리게 된 자는, 스스로?저절로 철학하게 된다.
시간을 낭비할 수 있는 진정한 자유 속에서라야, 비로소 ‘소리 없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영원한 초보자의 감각으로서 느린 속도를 타며, 늘 꿈만 꾸는 여행자도 있다. 그래서 삶이 놀이인 자는, 어쩐지 행복한 것이다.
강변을 걷는다.
느린 강물보다 다소 느리게 강변을 걷는다.
강물은 늘 말이 없다.
그런 강물이 좋다.
그래서 우리도 침묵한다.
향신료spice만큼도 역사를 장식할 수 없는 것이 대다수 서민대중의 역사적인 삶이다.
그렇다면 서민대중의 삶은 어떻게 제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온갖 도덕적 시곗바늘들이 죽음(소멸)을 향해서만 쉼 없이 내달리고 있다.
철학적 극복(체념)으로써나 비로소 상상될 수 있는 것들은 당최 무의미다.
그래서 여전히 오랫동안 역사를 작동시켰던 향신료의 희소성처럼 현실세계의 갖은 희소의 가치들이 단지 관습적(습관적)으로 새로운 향신료로 대체되고만 있는 것이다.
짐짓 신화 속에서나 실존하는(실현되는) 자유나 평등 따위의 개념들을 상상해 보라.
내 나이 열 살에는 부모의 사랑만으로 충분했다.
내 나이 스무 살에는 어떻게든 남들보다 잘 하고 싶었다.
내 나이 서른 살에는 어떻든지 남들만큼은 하고 싶었다.
내 나이 마흔 살에는 아주 고요하고 깊은 고독 속에 있다.
마흔 살쯤에는 半解脫이라도 해볼 요량으로 지금껏 아주 많은 공부를 했다.
하지만 여전히 成佛하지도 못 했고, 道通하지도 못 했고, 爲聖하지도 못 했고, 救援받지도 못 했다.
그나마 이제 스스로?저절로 춤추는 자처럼 고독할 줄은 안다.
공부깨나 했다는 옛사람이면 죄다 고독이야말로 성불이나 도통이나 위성이나 구원으로 가는 참된 시작점이라고들 했다.
공부깨나 했다는 옛사람이면 죄다 고독 속에 있을 때면 온갖 眩惑과 갖은 侮辱이 찾아들 것이라고들 했다.
정말 그렇다.
이렇게 멀리 떠나왔는데도, 나를 잠시잠깐도 고독 속에 내버려 두질 않는다.
그래서 더욱 공부깨나 했다는 옛사람의 이야기들이 오롯한 체험으로써 체득된다.
현대의 도덕철학자와 현대적 도덕철학자의 차이는 실로 자명하다.
현대의 도덕철학자는 단지 현대라는 시공간에 생존하는 도덕철학자다.
그런데 현대적 도덕철학자는 현대라는 시공간에 대해 도덕적인(윤리적인) 관심을 갖는 도덕철학자다.
다만 그런 관심이 바람직한 것인지 그릇된 것인지의 여부는 현대에서는 잘 밝혀지지 않는다.
그것은 도덕철학이라는 학문이 애매하고 모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도덕철학의 애매함이나 모호함이 도덕철학자의 책임인 것은 아니다.
어쩌면 누구의 책임도 아니다.
그래도 책임소재를 밝혀야만 한다고 주장한다면 그저 본래 애매하고 모호한 우주 자체의 도덕적 진리를 굳이 窮究하려고 하는 인간의 욕망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바탕에 철학이 있다는 사실쯤일 것이다.
그러다보니 지식(정보)만을 대상으로 삼는 교육(훈육)이 있다.
병자와 범죄자에 대한 예술적(철학적) 치유를 모색하는 인문학도 있다.
어쨌거나 현대는 도덕철학자들과 많이 닮아 있는 ‘수학자로서의 철학자’나 ‘신학자로서의 철학자’보다는 아무래도 ‘예술가로서의 철학자’가 요구되는 시대인 듯하다.
혈압blood pressure을 조절해주는 약은 한 번 먹기 시작하면 평생을 먹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