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정보
포이톨로기 (문학동네시인선 017)

포이톨로기 (문학동네시인선 017)

저자
김병호
출판사
문학동네
출판일
2017-11-28
등록일
2019-08-06
파일포맷
EPUB
파일크기
0
공급사
북큐브
지원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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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시(詩)와 서(書)만큼 어울리는 게 또 있다. 시(詩)와 수(數). 의외라고? 하지만 생각보다 자주 서로 스며든다. 과학을 전공한 시인들을 떠올려보자. 그들의 시를 읽고 있자면 어떤 함수를 보는 느낌이다. 물리학을 전공한 김병호의 함수는 그중에서도 가장 정교한 축, 귀 기울이면 우주의 비밀이 들린다. 1998년 『작가세계』로 등단했을 때부터, 첫 시집 『과속방지턱을 베고 눕다』를 내며 일관되게 들어온 평은 스케일도 문장도 ‘대담하다’는 것. 자연과학 이론을 시로 자기화, 내재화시키는 놀라운 응축의 힘이 시집을 흔든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이야기하는 미시물리학을 빌릴 때도 김병호의 대담함은 사라지지 않는다. 일찍이 문학평론가 신형철이 “에너지를 뿜어대는 힘있는 서정”이라고 짚은 바 있는 그 대담함이다. 이번 시집에서는 시를 새로운 신념체계로 다지는데, 이를 두고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이민호는 “환상시학 선언”이라며 김병호가 “우리 시의 새로운 유토피아를 열게 되리라” 전망했다.



전에 없는 형식_ 우리는 사금을 채취하듯 오래 망을 흔들어야 한다



목차를 펼치는 순간 당황하게 될 것이다. 보통 50편 안팎의 시 제목이 나란히 펼쳐지기 마련인데, 여섯 항목이 끝이다. 시가 여섯 편인 것은 아니다. 여섯 덩어리의 산문이 시들을 삼키고 있다. 의미상으로 이어지거나 새로운 환기를 더하는 시들이 산문 틈새틈새에 자리를 틀고 있다. 아니, 사실 시의 형식을 하고 있지 않은 산문 덩어리들도 시다. 어째서 이런 해독이 필요한 형식을 취했는가 하니, 시인은 “여기 퍼 부린 하나의 난삽한 형식”은 “청소하기 싫었”기에 취한 것이며 “청소가 훼손일 때도 있다”며 ‘시인의 말’을 통해 일종의 선언을 해버린다. 난감하다. 독자들은 시를 건지기 위해 바로 인지할 수 없는 수열(數列)의 강에서 사금 채취망을 들고 오래 흔들어야 한다.

그런데 이 형식은 내용과 바로 맞닿아 있다. 현대 물리학에서 가장 흥미로운 개념 중 하나인 ‘관찰자’를 떠올려보자. 독자가 바로 그 관찰자다. 독자가 관찰하지 않으면 이 시는 현실화되지 않는다. “현실이란 환상이 가진 무한대의 영역 안에서 관찰자에 의해 선택되어 붕괴된 파동함수”라고(12쪽) 시인은 첫머리에 친절히 설명하고 있다.





새는 암염에만 내려앉을 수 있었다 바위가 품은 50만 년의 기억을 핥으며 만 개의 산을 건너왔다고 했다 과거가 자신의 먹이라는 말이 끝나기 전에 내 과거를 샅샅이 들여다보았다 작은 새를 바라보는 일이 내가 먹어치운 모든 시간보다 무거웠다

(「사건」 부분)



7은 5보다 1.4배 크다거나 14의 절반이라는 비율이 그의 태생 전부이다 그러나 눈을 틀어막고 울어야 할 순간, 상징과 환상으로 번식한다 네번째 소수(素數)라 했다 근거 없는 행운이라 했다 잘게 떨고 있는 옆방의 어둠이라고 했다 누군가 옆방에서 얘기하고 있었다

(「9는 행복한가?」 부분)



전에 없는 서사성_ 유머와 공포와 그리고 사랑



전자기 현상의 모든 면을 통일적으로 기술하고 있는, 전자기학의 기초가 되는 맥스웰 방정식으로 시를 쓴다면 어떻게 될까? 누군가는 근엄한 얼굴로 우주의 비의에 대해 웅변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김병호는 그 맥스웰을, 봉지 커피 맥스웰에 대입하여 유머러스하게 풀어낸다. 이렇게 위트 있으면서도 핵심을 찌르는 이야기는 보기 드물다.



그러니까

위악도 농담도 위상공간도 아닌 현실에서 여자의 이름은 춘자였다 춘자가 뿌리는 향수는 반경 3킬로미터의 영향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 공간 안에 들면 남자들은 반응하기 시작했다 이 현상은 춘자의 표면에 전기를 띤 입자들이 얼추 모여 있기 때문이며 따라서 춘자의 주변에는 특정한 장(場)이 형성되었다는 이론을 검증하려 덜 익은 복숭아 찌르듯 춘자의 볼에 손가락을 댔던 부동산 박씨가 정신을 차린 곳은 내장이라도 보일 듯 닳은 소가죽 소파 뒤편으로 2미터는 족히 날아간 자리였다 순간 주변이 벼락이라도 치듯 밝아졌다가 어두워졌다는 증언은 동석했던 과일 가게 추사장의 것이었다 달리 설명할 도리가 없었다 춘자의 표면에는 뭔가가 있다고 수군대기 시작한 지 얼마 후 그러나 어차피 이 우주에 전하는 두 종류밖에 없다며 힘없이 춘자를 따라 걷는 남자가 마을에 나타났다 (중략) 두어 달 전 말자가 마을에 모습을 드러낸 후 정다방 내부에서 일어난 역학관계의 변화나 춘자와의 불화에 상관없이 말자에게는 항상 남자친구가 있었다 우주 탄생 이후(정확하게 10-10초 후부터) 항상 그랬으며 말자가 반으로 나누어졌더라도 반쪽짜리 남자친구가 탄생해 붙어다녔을 것이라고 수군댔다 하여간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미모를 수완으로 메우고 있는 말자는 남자친구에게서 자신의 모든 성질머리를 받아주는 존재 이상의 가치를 찾지 못했다 이런 남자의 존재는 우주적 안정에 일조하는 면이 크다 실제로 일정한 거리를 두고 말자와 남자를 바라보면 둘은 평온해 보인다 남자가 말자의 모든 돌발적 에너지를 받아내어 감내하고 있기 때문에 그 내부적 들끓음을 눈치챌 수 없다

춘자가 만드는 장(場) 또한 항상 일정한 것은 아니었다 태양 흑점의 변화에 영향을 받는다는 설도 있었지만 보다 현실적인 원인은 주변의 습도와 그날 화장 먹음의 정도, 지난밤 잠자리의 만족도 등이 거론되고 있었다 사실 말자가 보이는 변덕의 근본적인 원인은 춘자의 아름다움이 매순간 어떤 상태를 보이는가에 달렸다는 주장이 정설이다

(「맥스웰방정식」 부분)



그런가 하면, 물에 주기적으로 잠기는 마을에 대한 시 「몽현(夢玄)」에서 김병호는 서늘한 목소리를 낸다. 물이 첫번째 둑을 넘으면 사람들은 “언제 모를 내고 언제 나락을 거둬야 하는지 모두 잊”었고, 두번째 둑을 넘으면 “산에 올라가 3년 전에 나무하다 잃어버린 낫을 한 식경도 헤매지 않고 정확하게 찾아오거나 미친 듯이 조상의 묘를 파헤쳐 이유가 새겨지지 않은 뭔가를 열심히 찾”았고, 세번째 둑을 넘으면 코가 “검은 물이 차오른 수면 위와 아래를 오르락내리락했지만 숨 쉬는 일을 잊었는지 아무 떨림도 없”었으며 “물은 산 사람들의 땅도 아니고 죽은 이들의 바다도 아닌 낯선 섬 안에서 배회했”다고 말하는 김병호는 어쩐지 한 사람이 아닌 것 같다. 이야기는 마치 오래 구전되어온 전설 같아서, 현대를 살아가는 한 사람이 지어낸 것이 아닌 것만 같다. 그리하여 읽고 나면 물이 빠지고 난 후의 사람들처럼 “축축한 집 안으로 들어가 꼬박 아흔아홉 날 동안 볕을 보지 않고 앓”을 듯하다. 익히 알려진 이야기를 비튼 「피리 부는 사나이」에서도 마찬가지다. 가뭄이 든 마을, 사람들이 관습으로 간직하던 하얀 젖니를 대가로 받아 오독오독 씹는 피리 부는 사나이의 이미지는 강렬하다 못해 몸서리쳐진다. 그런데 그 사내는 막상 물을 가져오지 않고, 공포심을 가져간다. 물 없이도 두려움 없이 사는 사람들에게 찾아온 부작용. “호기심을 잃었다 아무것도 궁금하지 않았다 그러자 미래는 내용물 없는 무게일 뿐이었다 공포와 호기심은 같은 화학적 조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도 새로운 것을 만들지 않았다”

이어, 사랑을 말할 때 더욱 빛나는 김병호의 서사성도 짚어볼 만하다. 5백만 원을 꿔 가고는 소식이 없는 영순씨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나는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시간과 공간은 밀가루 반죽처럼 한몸이어서 공간을 늘여대면 옆면인 시간이 쫄아붙고 시간을 많이 쓰면 공간이 꼼짝 않는답니다. 그래서 깨달았습니다. 당신과 만날 그날까지 가장 빨리 시간을 낭비하는 방법은 꼼짝 않는 것입니다. 공간을 안 쓰면 시간은 빨리 갑니다. 몇 날을 꼼짝 않고 누워 있었습니다. 그러나 문득 이 야속한 지구는, 위도 37도인 이곳에서 1초에 464m의 속도로 자전하고 있었습니다. (아, 어지러워라) 또 1초에 29Km씩 공전하고 있으니. 거기에 우리 은하 또한 어마어마한 속도로 돈답니다. 돌겠습니다. 꼬인 내 인생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중략) 내가 당신께 달려가지 못하고 여기서 기다리는 이유는 150근짜리 내 몸이 강력한 중력장(gravitational field)에 묶여 있어서가 아닙니다. 영순씨가 떠나던 날 내게 집어던졌던 휴대폰이 깨지면서 만든 사랑장(love field) 때문입니다. 이 마을에 중력은 없습니다. 나는 둥둥 떠다니지만 아직 여기에 있습니다. 언젠가는 이 장(field)에 걸릴 당신과 5백만 원을 기다리면서.

(「영순씨를 기다리며 쓰는 연서(戀書)」 부분)

당신의 필드(field)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는,



우리는 결국 누군가의 필드에 속해서 토할 때까지 빙빙 돌고 있다. 완전한 패배를 인정할 때까지. 어쩌면 인정한다 해도 계속. 미미한 우리 존재는 “내 얼굴/ 당신을 바라는 쪽만 진물 흘러요”(「악수」) 토로해보지만 우주는 매몰차다. 눈앞으로 “콧물을 빨다가 내장까지 들이마신/ 공복의 저녁을 낙타가 지난다”(「시」) 해도 무력할 뿐.

그때 김병호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끊임없이 서로 관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무도 바라봐주지 않는 이는 그저 가능성일 뿐이다. 자리잡지 못한 가능성. 관찰은 위안이다. 서로 살 부비기 위해 잠시 현존하는 그렇게 서로를 존재하게 만드는. (49쪽)



그 말을 들으면, 우리, 정말 위안을 느끼게 된다. 관찰이라는 단어 자체가 지니고 태어난 거리감을 지우며 살 부비게 된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시인이 얼마나 뛰어난 시인인지를 잠시 생각한다. 비단 이 시집뿐 아니라 오래, 김병호를 관찰하고 싶다.





시인의 말



내가 제일 듣기 싫었던 말은 시는 이러해야 한다는 강요와 청소하라는 압박이다. 그러나 여기 퍼 부린 하나의 난삽한 형식은 그 반작용 때문이 아니다. 나에게 시는 그렇게 다가왔고 이렇게 새어나와 바닥을 적셨다. 청소하기 싫었다.

어둠이 70퍼센트의 농도로 공간을 점령한 이른 밤, 담담하게 바라보는 치우지 않은 방과 책상은 어떤 문명이 남긴 미학적 폐허로 다가왔다. 그러나 이것도 난삽의 이유는 아니다.

솔직히 말하자. 나를 둘러싼 시공간이 속삭인 것을, 소용돌이치면서 내게 각인한 것을 그대로 옮겼을 뿐이다. 그러나 누구는 청소하라는 외침 뒤를 메우는 작은 메아리에 대한 오해라고 했고 반(反) 청소적 심리 상태가 만드는 환청이라고도 했다.

어둠이 30퍼센트로 희석된 이른 아침, 책상은 더께 앉은 화석이다. 청소가 훼손일 때도 있다는 핑계가 얼마나 타당한지 따져보는 일은 다시 미룬다. 청소하기 싫다.



2012년 3월,

김병호





책 속에서



기댐



흉은 사람에게만 기생한다 그러나 사람에게 가장 깊은

흉을 만드는 건 사람이라서, 살이 가장 잘 어울리는 게 사람이라는 오해가 흉흉했고

흉이 터를 잡기 가장 좋은 곳이 살이라는 소문이

사랑이 땅 위에 터를 잡았다



머리 하나가 온전히 내 어깨를 누르는 순간 생은 부정맥이다

내 것이 아닌 불안한 맥동이 살을 누르는 아침

한생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미숙한 무게로 온전히 자신을 던지는



머리와 어깨는 이상하리만치 서로를 부른다

살이 흉을 부르고 흉이 터 잡는 어느 살



살아 있는 자 한 명당 백만 명의 죽은 자가 있는데,

이 작은 호흡 하나에 백만 명의 슬픔이 쌓여

한기가 먼저 핥은 살을 파고들어 터 잡는다





여자의 지문(指紋)



몸을 이루는 모든 원자(原子)가 바뀌어도 기억이 너를 찾는 건 정체가 내 몸에 서린 것이 아니라는 수군거림이라 수긍해도 너를 조립하는 최소단위(單位)들이 모두 자리 바꾸는 석 달을 내리 숨 참으며 기다려도 항상 내게서 튕기는 네 방향성은 지구가 외면하는 방향이 46억 년 동안 변하지 않아 생긴 극성 때문이라는 건 왜 아무도 귀띔 안 하는지, 물질을 원망하지 않고 정신을 원망하지 않고 생(生)이라는 흔적 없는 궤적을 흩어버리는 마지막 바람만 미워하니 내 주변을 휘도는 특정한 패턴의 흔들림이, 그것이 개성이라는 각각의 성깔이니 아, 너이니, 정처 없는 원자(原子)들은 몸에서 한바탕 흐느끼다가 나갈 뿐, 단지 패턴으로, 패턴이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흔들림이라는데 네 패턴은 단지 지문(指紋)의 쏠림만은 아닐 터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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